이이체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4 (2022)

이이체 시인(본명:이재훈)

1988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2008년 《현대시》에 〈나무 라디오〉 외 4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죽은 눈을 위한 송가』(문학과지성사, 2011)가 있음.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 휴학중.

<1>-이산(離散)/이이체-

나비의 날개에서 봄이 접힌다. 휘몰아치는 나선계단의 말미에 붉게 빛나는 대문이 있다. 등(燈) 대신 피를 밝혀놓은 문설주, 바닥엔 낮잠을 깨운 기와가 즐비하다. 열린 문틈으로 노랗게 익은 마당이 펼쳐지고, 원근법으로 늘어진 시절이 덩그러니 누워 있다. 지붕 아래 과년한 나무들을 베어 지은 툇마루에 기녀들이 앉아 꽃잎들이 날아가는 쪽으로 눈길을 흘린다. 가장자리에서 가만히 타오르는 무화과나무, 불꽃이 몰래 살고 있는 나무의 후생이 푸르게 타오른다. 태양 대신 점점이 번쩍이는 꽃송이들이 하늘하늘 날아간다. 최후의 종교가 사랑방에서 단잠에 빠져 있다. 기녀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날개 같은 부채를 휘둘러 불꽃을 시들게 한다. 불현듯 별채에서 순례자들이 바람결에 통곡을 반주한다. 서까래가 구불구불 흐르고 있다. 어느 계절, 어느 시절인지 분간할 수 없다. 순례를 가득 진 등짝들이 몰려간다.

<2>-종말론/이이체-

입술이 없는 묵언을 새겨듣는다. 혼(魂)이 휘청거리자 삶은 조금 기운다. 사람의 아들이 자신의내부를 들여다볼수록 미래가 조금씩 흔들린다. 과거는 거짓말의 전복이고 반복이다. 모두 사라지는 풍경화. 말이 생경한 종이들은 모두 의미에 대하여 제사를 지낼 것이다. 손바닥에 총구를 겨눈 절망이 장전된다. 진심을 전하고서야 비울 수 있는 무심이 채워진다. 생전으로 후퇴하지 못한 갖가지 주술들이 세계에서 종적을 감춘다. 열기는 온도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온도의 분위기에 의한 것이다. 부모로부터 훔쳐온 삶을 간증한다. 금욕울 타작하는 사람들을 불경하게 여기는. 방아쇠 당기지 않은 흉기만이, 무한(無限)을 걸어서 미궁을 건설할 것이다. 모든 것에는 저의가 있다. 잊다.

<3>-향과 숲/이이체-

사양할 수 없는 퇴폐를 맞는다

비유가 집요해질 때

몸과 마음은 서로를 읽지 못한다

해석의 간격

그 이야기에는

육체의 뼈마디마저 순서대로 전개하지 못하는

혼돈이 위장하고 있다

툰드라, 생소하게 솟아난 초록들

하얀 잎사귀들이

숫제, 잠자는 야수보다 생생하게 고요하다

말의 맛마다 식별할 수 있는 요설(饒舌)이 있다

머리 잃는 뿔,

산수화는 쾌락에 수줍어서 속되다

등줄기로 서늘하게 비치는 무더위,

어디선가 흘러온 밧줄이 조악하게 고여 있는 설원

오래 전 멸종한 독이

눈동자에서 흐느끼기 시작한다

<4>-살아남은 애인들을 위한 노래/이이체-

한번의 연애가 끝나자 한편의 시가 완성된다

당신을 필사해온 내 이력의 최후

모든 외마디는 명멸한다

돌아오지 않는 폐곡선,

오늘은 누구라도 나를 조심했으면 좋겠다

상처는 녹슨 뼈에 새겨지는 방식으로 남겨진다

필름이 끝나는 소리가 난다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나는 곁에 있는 게 아니야, 그저 남겨지는 거지

아무런 감흥도 없이

입에서 귀로 흘러들어가는 종언

나는 당신을 저주하는 나를 용서하기로 한다

날짐승들은 흙을 더 많이 기억한다

부르튼 눈동자로 보는, 푸르지 않은 수평선

모두 잊고 태워버린 시집에는

완벽하게 윤색된 기억들이 아우성치고 있다

거짓말들로 꾸려진 가구들은

언어의 공백을 감정하느라

사무치도록 흉측했을 것이다

오해할 수 있는 만큼 이해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오해하는

아무 이유 없이 오랫동안 가만히,

서 있고 싶을 때가 있다

버려진 퍼즐 한조각 같은 불구로 남기를

당신보다 당신의 비밀을 사랑해요

사랑의 애인이란 그토록 외로이 무능하다

처절하고 치졸하다

연애, 가장 소원한 애무는 위로받는 일

타인이 쓰고 간 축축해진 칫솔을 다시 쓰면서

때로, 만나본 적 없는 소문이 나를 살해한다

창가에서 상념과 함께 블그스름하게 젖어드는

육신을 위해 날개를 만들 것이다.

촛농을 녹여 만든……

어떤 애인은 살아서도 방치되는 의미에 가깝다

당신의 뼈를 잊지 않을게요

부둥켜안아도 만질 수 없던 그 내부의 울림을

입술들을 다시 모아 붙이면

침묵을 폭로하던 홀몸이 부서질 것이다

어떤 익명이 나를 안으면 그 이름이 되겠다

윤회의 집에 이르러,

불살랐던 시집들이 낳은 잿더미가

뿌옇게 바닥을 지배하고 있다

당신은 내 심장을 기억해주시겠습니까

가면들은 저마다 자신을 풍자한 언어에 불과할 뿐

제 몸이 아픈 줄 모르고 떠났다가

죽어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

통증을 얻으러 나선 전쟁터에서

수레 가득 주워온 죽음들끼리 서로 부대낀다

저 무일푼의 생애들을

현생에 초대된 적 없는 연애로 봐도 될까

나는 당신이 버리지 않는 시구로만 독해되겠다

비유로부터 빌려온 애인이

헐벗은 습성을 보채고 있다

몇가지 다른 종류의 침묵들이 갖고 싶어지는 순간

문 열린 독방에서 나가지 않는다

<5>-연인/이이체-

우리는 서로의 몽타주다

나는 세계를 지우는 일을 했고

너는 세계를 구성하는 구멍에 빠졌던 가난

의붓아들과 의붓딸의 만남

우리를 낳지 않은 우리의 부모들을 탈각했다

가진 적도 없던 것을 지키려고 애썼고

서로 악수하면서 서로의 손을 혼동해서 침묵했다

우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게 되었음에도

(Video) 임용고시 전공국어 2023학년도 3월 현대문학 핵심 작품(현대시) (1) - 해커스임용 인강 국어 최병해 -

거울로 방을 가득 채웠으며

서로의 혈액형도 모른 채 피를 섞었다

나는 녹슨 문 앞에 앉아

고드름을 부러뜨리는 부랑아

너는 너에게도 어울리지 않아서

하염없이 누군가를 치환하지

우리가 살찌고 행복해서 질려버릴 때

잊을 수 있겠지만 잊지 않겠다는 주(呪)를

미신처럼 읊조릴 거야

내가 없었던 세상을 가장 근처에서 만지는 일

네가 없는 꿈을 꾼 적이 없다

우리는 유기되었다

세계와 거의 비슷해지는 중이다

없애러 간 곳에서 얻어서 돌아올 것임을 안다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몸이 부풀이 오른다

예쁜 예감이 들었다

우리는 언제나 손을 잡고 있게 될 것이다

<6>-너희들의 사랑-시드와 낸시/이이체-

너희들은 같은 꿈을 꾸었다. 쉰내 나는 낡은 술집에서 새벽을 넘기도록 술을 마셔도 괴롭지 않

았다. 너희들은 전깃줄이 흐드러진 밑바닥에 발을 쿵쿵거리며 베이스기타를 쳤다. 그러니까, 어

느 무엇에 대한 노래, 이젠 놓아야 한다고 깨닫는 순간부터 비로소 놓아버리는 순간까지의, 너

무 긴 시간이었다. 베이스음 같은, 낮은 곳이었고 더 오를 곳도 없었다. 없어도 되는 것들이었

다. 섹스를 하지 않은 채로 잠들지 않아도 내내 한 꿈 안이었다. 테이블의 닳아빠진 모서리에서

꽃이라도 필 것처럼 초록빛이 맑았다. 그렇게 늘고 추한 간판아래였는데. 넘어진 술잔과 의자는

깉은 게으름이었다. 단조로운 음을 되찾기 위해 위험하게 튜닝을 했고 너희들은 서로의 눈을 피

하지 않았다.무섭고 우울한 키스였다.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결국 가까운 건 하늘보단 바닥이

라는, 너희들의 노랫말. 기타줄은 하나하나 다 뜯어져 있었고 피크는 술잔에 담겨 있었다. 이건

절대적으로 너희들에게 불리한 꿈. 눈감아도 너희들의 사랑을 볼 수 있었다.

<7>-태엽/이이체-

화염의 번식은 사물의 몫이다

돌멩이들은 공백이어야 무방하다

첼로가 눈사람에게

순례의 말로에는

풍화되지 않을 암석만

모래로 분장한 채 고고하게 앉아 있다

혁대를 두른 동물인형들이

휘둥그레 눈 뜨고 잔다

사랑이 횡포를 부리던 지옥

뭍은 푸석푸석할 수 밖에 없다

여우들이 어두운 숲의 밤을 쓸고 다닌다

가장 마지막으로 꾸게 될 꿈을 예고 받은

신탁처럼

<8>-육식/이이체-

알은 제 몸을 깨트려 새를 낳는다

낳아서 비행의 전생으로 거듭난다

나를 욕하는 당신의 목소리

그 색채

색의 몸

인간을 사랑해서 모든 인간을 제 몸에 엮었다던

프랑켄슈타인 이야기

내가 당신의 둘레를 맴도는 팽이야

낱말들

서커스

당신이 내게 울부짖는다,

나는 나 빼고 무엇이든 될 수 있어

당신이 혼자 오열하는 소리

당신은 혼자 오열하는 소리

영혼의 터전에서

<9>-연옥의 노래/이이체-

나는 번역될 수 없는 사랑의 한 구절이다

허공은 영문도 모른 채

나뭇가지들로 제 터전을 빼앗긴다

어느 부족의 여자들은

뺨 위에

눈물이 흐르는 길을 화장하는 관습이 있다

부적들을 옷처럼 기워 입은 숙명

병마의 질감은

몸속에서 나를 환멸하는 피로 이루어진다

빙원(氷原)의 원주민들은

덥힌 고래 고기를 단도로 도려내면서

무서운 파계를 기린다

돌연, 풍만한 기형들이 결백의

전말에 침식하기 시작한다

나는 슬픈

기둥이 되지 않겠다, 기필코 쓰러지겠다

할례받지 못한 식물

굼뜬 실종을 되찾아오기 위해,

활잡이들은 살육에 무능했음을 회개한다

풍토병에 걸린 나무들

그 흉악한 청빈의 교리

나는 나 없이 떠도는

나에 대한 거짓말들이 싫고,

환생으로 발도 없이 흉흉하게 돌아다니는

물상의 형국이 부럽다

입술을 얻어 오리다, 사람을 일깨울 수 있는

입술을 버리고

나는 그늘을 참회한다

<10>-귀향/이이체-

비바람으로 점철된 풍경이었다. 어린 남동생을 등에 업은 어머니는 시골로 향했다. 굴

뚝과 매연이 어머니를 배신해서 어머니도 배신했다. 더러운 세상, 더럽고 치사한 세상.

빗줄기가 거세어져도 어머니는 시골 향하는 길목을 걸어갔다. 천둥소리가 울렸지만 포

근하고 아련했다. 길가에 즐비한 향나무들이 빗물에 젖어 옛 살색을 드러낸 채 늘어서 있

었다. 남동생의 기저귀에서 조로(早老)한 과일의 썩은 냄새가 났다. 어머니는 입으로만

말했다. 회색 입김을 토해내던 굴뚝들이 그립구나. 말뿐인 말이었다. 풀냄새가 머릿속까

지 시리게 번졌다. 어머니는 꾸준히 시골로 걸음을 옮겼다. 향이 나지 않는 도시 교외의

공장들이 눈에 밟혔다. 비가 그치고 날이 갤 무렵, 갓 트인 샛길이 보였다. 남동생은 코앞

에서 시큰한 매연을 맡은 것처럼 울상을 짓고 울었다. 그래도 개의치 않을 풍경이었다.

어린 샛길이 밝아 어머니는 발을 그리로 옮겼다. 시골에 가면 맑은 과일을 먹자꾸나. 염

세적인 햇살이 따스했다.

<11>-창백한 숨결/이이체-

외설 없는 요설이 끝난다

건조한 실내등을 끄고

나는 깊어지는 곳까지 삶을 들여다보는

눈을 가진다

잎을 피로 분장하는 가을나무

대낮에 잦아든 달의 가파른 곡예가 있다

설익은 의미에 취해

내 몽상을 가누지 못하는 시계도 있다

바람을 울리며 순례하는 새떼들

스스로 물살인지도 모르고 쓸려가는 물살

흙과 돌에 제 몸을 부딪고 찢으며

욱체의 경계를 가늠해본다

심한 돌풍이 일 때마다 제방을 넘어오는

물 위로 연약해진 숯불을 던진다

부지깽이를 들고 뛰노는 아이들

나는 뜨겁게 달군 술을 마시곤

허공으로부터 담보로 받은 빈 자리에 앉는다

소금 바른 시체들과

화장을 준비하는 노파들

내 키만틈 자란 그 환유가 벅차서

썩은 진물도 찬란하다

어두운 시간이면 습관처럼 깜빡이는 실내등이

낙서된 틀을 만회하고 있다

몽상에서 거절까지의 취기

가을나무들은 다시 한 번 계절을 확인해주듯

피 묻은 잎들을 떨구며 나를 반기고

달이 다시 농밀하게 젖어든다

의미가 신학을 부르고

물 없는 환송으로 산 자를 받는 항구가 열린다

시간을 복용하는 시계

안다, 물살을 가르는 늙은 여인들

또다시 실내등이 빛을 닫는가

내 것이 아닌데 나를 외우는 온도가 있다

내 피는 나를 속이지 않는다

절벽을 걸어라 구원받지 못한 아이들아

아름다운 공포들아

통곡하는 바람

새떼들로부터 비롯되는 순례자의 혈통

<12>-인간이 버린 사랑/이이체-

내 그림자가 아픈 날, 신은 태어났다

두 번째 입맞춤이었다

모든 눈썹으로 당신의 눈을 숨긴다

서로를 사랑한 적 없는 유골들을

불덩이 속에 던져 버리는 해방감

이해될 수 없어서 나는 나를 버리지 못한다

추수가 끝난 허전한 밭에서

몽유병자들은 잠의 혁명을 곱씹었다

도시로부터 낙향해온 중늙은이들이 말했다

빛을 잃을 줄 아는 밤,

우리는 이것이 그리웠단다

이렇게 내 거짓이 아름다우니까, 당신이여

봄날처럼 미치도록 만발하는 죄책감이

육체를 점령한다

여러 사랑들을 차례대로 지우는 것으로

유서를 써 내려간 후,

마음을 잃은 상징들을 건축한다

사랑은 나와 당신의 마지막 구절을

영원히 되풀이하는 일이다

말을 위해 입술들은 늘 멀리 떨어져 있었다

공간을 벗어나 다시 공간으로,

나는 기도문처럼 전생들을 회고할 것이다

흉터는 모두 한 편의 시

들판, 몸을 잘린 채 겨울을 기다리는

보리풀들이 느리게 춤추며 꿈을 꾼다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자신의 도시를 버리고 떠나온 패배자들

어둠이 짙어질수록

나와 당신은 침묵으로 끓는다

불장난이 시작되고, 밤은 또다시

빛이라는 강박을 가져야만 하리라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은 더 오래 기다릴 줄 알았다

그러나 우연에 실패하는 우상들이여,

사랑은 이 저물어가는 필연의 세계에

기록되지도 기억되지도 못할 것이다

흉터는 모두 한 편의 시

늑대의 식은 주검을 파헤치면

이름을 망각당한 날벌레들이 하늘을 치듯이 난다

풀이 바람과 마찰하는 소리는

당신의 연한 웃음소리,

달이 비추는 자리마다 빛나는 그루터기들

밤이 밝아지면서,

나는 늑대의 털가죽을 벗겨 맑게 씻어내고는

유골들 위에 덮어놓았다

저 지평선에서는

시간의 다른 혈족이었던 음악이

소리 없이 잦아들고 있었다

유서에 계약한다는 일은

혁명의 실패에 서명하는 것이며

혁명이 실패로 망명하는 것

이내 헐벗고 야윈 추상이

당신에게 전설을 입혔다

그 참상에 바람도 몸을 떨었다

이곳에서조차 어둠이 잊혀질 무렵이면,

잠들어도 실패할 수밖에 없던 혁명의 이름을

한 권의 후생이 기억해줄지도 모른다

외롭고 새롭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하나의 외국어를 만들고 싶다

흉터는 모두 한 편의 시

내 거짓이 아름다우므로,

이 땅의 우상들이여

도시로부터 추방당한 붉은 신들이여

지문 없는 기억은 추억이 아니니

당신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지구의 눈이

내게 있다

<13>-신/이이체-

사탕수수 밭에서 불길이

전염병처럼 휩쓸려오고 있다

조랑말들은 이제 우는 법을 알게 된다

통제를 할 줄 모르는 무녀들

호각 소리만 산허리로 검푸르게 퍼져나가고

달이 바뀔 때까지

이승에서는 노공이 문풍지를 바를 것이다

장독대 밑

깨져 있는 옥구슬,

불꽃 한 송이 한 송이를 애틋하게 품으면서

승려들은 들판을 그냥 건너지 않는다

시허연 머리를 수그리고

관찰하는 인사말

수증기에서는 피 냄새가 난다

<14>-유언연습/이이체-

두 노예의 사랑은 이렇게 전승된다. 벽화에도 그려질 수 없던 원죄의

실패한 연애담. 죽은 나무 속을 개들이 핥는 숲이었다. 따스한 햇볕조

차 막연하게 지속되고 있었다. 자꾸 헛발을 내디뎌 비척거리면서 그들의

피부를 옅게 데워주었다. 그들은 보랏빛으로 퇴폐하는 환영을 보았으나

외면하는 습관을 떠올릴 뿐. 한 노예가 제 살 위의 햇살을 조금 옮겨다가

다른 노예의 두 볼에 발라주었다. 달이 네 눈으로 옮아가기를. 얼음수도

원에서 울려 퍼지던 어느 교성의 색채를 음미하면서. 몸을 갖지 못한 시

간에게 기억을 한 움큼 내주고, 숲은 안식일을 얻어서 약간씩만 교만해

졌다. 노예들은 십자가 꽂힌 공동묘지 그림을 기억해냈다. 날 당신의 내

부에 들여보내주지 않을 거죠? 히죽거리며 눈치 보는 곱사등이들을 상상

한다. 불량한 충고를 주워들으며 섹스하는 것 같다. 딸꾹질이 멈추지 않

아서 노예들은 각자 다른 나무 뒤에 숨었다. 개들은 사라지고 개들의 이

빨만 남았다. 과묵한 독방에 소외되었다.

<15>-인간은 서로에게 신을 바친다/이이체-

많은 이별을 겪다 보면

사랑이 이제 우리의 외곽일 뿐인 시간이 온다

내면이라니,

제 속만 헤집느라 상한 그 동굴 속

박쥐들처럼 흉터가 거꾸로 맺히고

살갗이 조금이라도 쓰라리면

마음의 사도들이 경을 왼다

밤의 언저리

성운(星雲)은 월식으로 흐르는 열외의 구름

작고 무거운 종들은 바깥의 가장자리만 가진 탓에

흩어지지 못한다

다 흩어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함부로 마주 보아선 안된다

서로의 사악함을 알고도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미친 자들의 눈

눈의 유해(遺骸)

<16>-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곡*/이이체-

화상이 추억하는 불씨를 갈망합니다

시간을 가질 수 없는 향이 있습니다

석양이 내려앉으면서 가장 마지막으로 물들이는 마을처럼

멀어지는 획을 그으며 붓은 점점 비릿해집니다

달콤한

검은 술

늙지 않는 여독만 태우고 흔들리던 그네

아래로 오지 못하는 성좌를 정처라고 부르면서,

낯선 악기는 겨우 음(音)을 겪습니다

그믐달로 조금 잘려나간 밤의 틈새를 메우려고 어두운 우물이 고이는데

삶의 유래는 그같이 절제된 편력에서 착각될 수 있겠습니까

어느 이명은 창공을 얻고

꿈의 모형을 가져온 외계에 돌 던질 수 있습니다

형벌들을 싣고 떠나는 마차, 손가락을 구부리면

환각의 솜이 폭신합니다

산송장의 피고름을 짜 내며 더벅머리 소년들은 울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가혹한 감탄들을 보살피고 죽는

부연 아침 같은 백야를 지나오는

육신의 조상들

만월의 풍속으로부터

시계탑은 바람들을 이주시킵니다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

<17>-죽은 눈을 위한 송가/이이체-

잊지 않은 것을 기억한다

연꽃 아래서 피어나는 주검

무너진 밤은 밝고, 설익은 해는 색을 지운다

어제 태어난 잠이 오늘

눈 뜬다

어떤 우주에서만 흐르지 않는 숨이 있었다

저무는 눈가에는

누군가가 등불 없이 스산하게 잦아든다

풀꽃들이 암수를 알 수 없는 음양을 가졌다

향을 피우지 않고 춤추는 여승들과

폐허

폐허

폐허의 허물

도시는 허물을 벗고 기어 다니고 있는 것

어느 길에서든 간단하게 헤매면서, 누구도 시린

눈을 죽일 수 없었다

나무들이 받아들이지 못한 숲

칼의 뼈

흉터 위에 소복하게 내려앉는 색을 보듬고

이형(異形)의 인생이

마르지 않는 강가에 이르러 눈을 씻는다

피와 눈물

피의 눈물

<18>-채식주의자들/이이체-

감각을 격리시킨 채로 이야기한다. 내가 이끼 낀 문명에서 태어났을 즈음이었

다. 알을 못 낳는 암탉들이 속된 사랑에 감염되었다. 문지기는 뇌쇄적인 실연괴

물, 쾌락과 타락을 음미하느라 밤색 머리의 처녀를 잊지 못한다. 성년식, 술에 취

해 옷을 반쯤 벗어젖히곤 이단異端하듯 놀아나던 촌뜨기들. 쥐덫의 둘레를, 괴혈

병 걸린 고양이는 제어할 수 없는 욕망으로 돌았다. 늦가을 들판에 우거져 있던

낯선 색깔들이 성가진 우연처럼 자꾸 눈에 거슬렸다. 그대들은 내일 미끼로부터

배척되어라. 거울을 상실 당한 쌍둥이형제들은 서로를 탐했다. 때로 문지기는 자

신의 가면 쓴 얼굴을 곡예라고 곡해했다. 유형은 치명적이었으므로, 들판에는 망

원경으로도 풍요로울 차례가 오지 않았다. 흔적보다 더 진한 외상을 찾고 있다.

똥파리들이 닭장의 마디마디에 맺혀 있었다. 변성기 갓 지난 아이들은 출혈이 멎

지 않자 통곡했다. 나는 풍향계를 믿어 본 적이 없다.

<19>-한량들-우리들에게/이이체-

우리는 늘 다쳤다. 어디에도 눕지 않은 채로 상처를 안고 흐느낄 수 있었다. 식욕도 느껴지

지 않게 하는, 진흙탕 속 엉망진창의 엉터리 기억들. 세상 모든 파편들을 풍경으로 얻어가도

배부를 수 없었다. 행복해라.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 아무도 우리에

게 말을 걸 수 없었고 우리는 아무에게나 함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기억이라는 동화 속에서 읽기에는

너무 어른스러운 부담

사랑이 어울리지 않는 연인들.

우리들은 서로의 눈을 읽으며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들으며 괴로워했다.

입맛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풍족한 소문이었지만, 사람들 사이를 오고 간다는 걸 제외하곤

꿈보다도 못했다. 우리는 노상 떠나갔고, 떠나왔으며, 상처받아도 돌아올 곳이 여기밖에 없었

다. 세상이 꾸는 악몽 속에서 어느 주검들의 비린내를 몰고 오던, 요절한 부랑아들을 닮아갔

다.

상징과 심장. 우리는 늙은 연인들처럼 언제나 서로에게 거울을 보여주며 마주 보고 있었다.

진실한 진술만을 적었던 혈서는 낡고 흐려져 읽을 수 없는 마술수첩 같았다. 한 방울 눈물의

기억에도 미치지 못하는 기적. 숫자가 매겨지지 않은 페이지들을 넘기며 우리는 소스라치듯

자지러졌다. 우리는 예전에 더 잘 미끄러졌는데. 쉽지 않은 자세를 잡기까지, 신중하고 다소

답답한 걸음으로 걷기까지. 볼 것들이 없어도 막상 보면 못 볼 것을 보게 되었다. 더러운 결벽

이었다.

안기 위해 기억해야 하는 어느 망각들.

보기 위해 눈 감고 입을 다무는 순간순간들.

연인들은 그림자를 벗어나지 않았다. 햇빛을 기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구걸하지도 않았다.

무게를 견디기 위해서는 무게가 필요했고, 우리는 가벼웠다. 방황이 우리에게 가야 할 방향을

물을 때, 풍경들은 모조리 눈물의 바깥에 있었다.

우리’는 당신에게, ‘우리들’은 나와 너와 너희에게. ‘우리들’이라고 하면

너와 나 말고도 누군가 더 있다고 느껴진다.

<20>-낭만주의/이이체-

벌거벗은 자들의 사막

깨진 달에서 다른 어둠이 발견되었다

타오르는 자화상을 가진 모래들은

형형하게 식어 보드라웠다

독을 뺏긴 뱀이 비단결 같은 모래 위를 지나가며 비단길을 만들고 있었다

음유시인들은 하늘을 향해 웃지만

그들의 밤에는 오직 기계만이 가득할 뿐*

모랫길 위로 연기가 흐드러진 달빛을 따라 흘렀다

벌거숭이들은 천사를 꿈꿨으며

질 낮은 낭만이 태양의 반대편에 자리 잡았다

이미 깨져 버린 달은 충혈된 눈

그림자가 고향을 찾지 못해 울었다

* 그들의 밤에는 오직 기계만이 가득할 뿐 : Allen Ginsberg,「Howl」중에서

<21>-가족의 탄생/이이체-

피는 발굴하는 것이다

나는 오래된 책에서 그것을 배웠다

백지장처럼 하얀 백사장에서

파도소리가 인다

파랗고, 빨갛고 노란 점들이

일그러진 원호를 그리며 번지고

바다에서도 건지지 못한 물고기를

소금기 어린 모래 속에서 찾는다

텅 빈 소라껍데기가 옹알이하는 소리,

신생아는 늘 징그럽고 하얀 느낌

나는 빨갛고 노란 점들도 있었는데

왜 파란 몽고반점만 남았지

그마저도 잃었지

여러 혈관들을 헤집고 다니는 상상을 한다

붉은 갈매기가 버리고 간

둥글고 넓은 거북이등껍질

익사하지 않은 책을 그 위에 싣고 나는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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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Lilliana Bartoletti

Last Updated: 11/0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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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Lilliana Bartole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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