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부활 설교 모음 - 김필곤 목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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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설교 모음 - 김필곤 목사

▣ 부활을 믿는 믿음은 최대의 복입니다.

본 문 : 요20:24-31

오늘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25년에 소집한 니케아회의에서 부활절은 "춘분 이후 처음으로 보름달이 뜬 다음 첫번째 주일에 지켜져야 한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세계 모든 사람들은 이 날을 부활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약력으로 치면 3월22일에서 4월25일 사이가 됩니다.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실망한 자에게 소망을 주는 참으로 기쁘고 즐거운 날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키고 어둠에 마침표를 찍고 빛을 주신 날입니다. 진정 참 기쁘고 즐겁습니까? 옆사람의 얼굴 표정이 어떻습니까? 자신의 얼굴 표정은 어떻습니까? 정말로 기뻐하며 즐거워 하는 것 같습니까? 세상 번민과 고뇌, 죄를 다 짊어진 우거지상입니까? 인터넷 유머를 보니까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구기자 전설이라는 유머입니다. 한국 남자들이 다 무기력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약 한 첩을 다들 잘 못 먹어서 라고 합니다. 그 약은 구기자라고 합니다. 구기자 한 잔 씩을 잡수어서 다 구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아내가 너무너무 근심이 되어 남편에게 뭘 하나 선물을 했답니다. 그러자 그 날부터 남편은 생기가 돌고 어깨를 피고 활기찬 삶을 살더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였겠습니까? [피자] 랍니다. 오늘 부활절입니다. 우리를 피게하는 것이 피자이겠습니까? 부활의 신앙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지면 얼굴이 활짝 피게 됩니다. 인생이 활짝 핍니다. 미래가 활짝 피게됩니다. 오늘 아직까지 부활을 믿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부활의 신앙을 가지기는 가졌지만 확신이 없으신분이 계시다면, 부활의 신앙이 있기는 있지만 부활의 신앙으로 인생을 활기있게 소망차게 살지 못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말씀을 들음으로 부활의 신앙이 회복되고 부활의 기쁨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이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야 말로 세상 그 누구보다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무나 부활을 믿는 것도 아니고 아무나 이렇게 부활 주일 기쁨으로 예배에 감격하며 참여하는 것 아닙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진정 복받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까? 평안히 잘먹고 잘사는 사람입니까? 평생 아프지 않고 건강한 사람입니까? 먹고 싶은 음식 바라보며 계산하지 않고 철 바뀔 때 옷장 여는 아픔을 갖지않고 동창회에 나가 자식으로 움츠려 들지 않고 원치 않게 이사하지 않으며 사는 사람들입니까? 물론 그런 사람들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만 복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저같이 집도 없이 월세를 살며 정처 없이 나그네처럼 사는 사람들도 참으로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29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까? 누가 뭐라해도 예수님께서 복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지만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이런 복 아무라도 받는 것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어떤 교훈을 해주시고 있습니까?

1. 믿음 약한 우리를 다 아시고 찾아 오셔서 부활의 증거를 보여주며 부활의 믿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24-27).

1)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도마는 어떻게 보면 실증주의자입니다. 실제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은 절대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 때 도마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못믿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보는 것만으로 믿지 못하고 내 손가락으로 그 못자국에 넣어 보야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옆구리를 직접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도마만 그렇습니까?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눅24:11을 보십시오.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소개할 때 반응입니다.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눅 24:11)"

허탄하다는 말은 어쩌구니 없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부질 없는 헛소리라는 것입니다. 꿈깨라는 말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베드로는 어떠했을까요? 바로 뒤를 보십시오. 용감하게 홀로 무덤에 갔습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 24:12)" 예수님의 시체가 없자 이상하게, 신기하게 여기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음이 있는 것 같지만 막상 제자들과 같은 상황에 도달하면 부활의 신앙을 약해집니다. 이것이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 주님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도마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손에 못자국을 보여 주고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 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연약성 하나님이 다 아시고 있습니다. 혹 회의에 빠지신 분 있습니까? 삶의 어려움에 처하신 분이 있습니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 23:10)

2)우리에게 증거를 보여 주시며 부활의 믿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현대인들은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습니다. 실증주의 자들입니다.

부부가 집사님인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교회에 나가기는 나가지만 그 아들의 눈에는 믿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끔씩이면 싸우고 식사할 때 기도도 하지 않고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교회에 갔다오면 늘 재미 있었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모처럼 어머니가 주일학교를 마치고 가자 오늘은 뭘 배웠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 때 아이가 말합니다. "오늘은 모세가 적들을 어떻게 이겼는지 배웠어요. 홍해에 도착해서, 모세는 다리를 건설해서 사람들을 모두 건너게 했대요.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건너자 그는 무전기로 본부에 연락을 해서 폭격기 지원 요청을 했죠. 폭격기는 폭탄을 떨어뜨려서 다리를 부쉈고, 적군들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대요." 그러자 어머니가 눈이 둥글해져서 "아가, 선생님이 정말 그렇게 얘기하셨니?"라고 물었습니다. "사실은 아니에요. 하지만 선생님이 얘기하신대로 말하면 엄마는 못믿을걸요?" 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믿는 것같이 보이는데 실제로는 않믿어요.

현대인을 지배하는 사고 구조를 지배하는 원리는 대강 세가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평의 원리, 유추의 원리, 상관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과거를 판단할 경우 진리와 비진리를 흑백을 가리듯 쉽게 가릴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재분석하고 평가하고 종합하여 실제 그런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 비평의 원리입니다. 어떻게 부활해 죽어 보아야 알지, 천국이 어디 있어 가보아야 할지?라고 생각합니다.

유추의 원리란 과거의 경험은 결코 현재의 경험과 완전히 다를 수 없기 때문에 현재의 경험하는 것이 과거 경험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일어 날 수 없는 것은 과거에도 일어 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부활이 없는데 어떻게 과거에 부활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상관의 원리라는 것은 과거의 발생된 사건은 우연 보다는 원인과 결과의 인과 관계를 가지고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어떤 조건을 주면 계속적으로 부활이 일어나야 그것을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원리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원리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히11:1)는 믿음의 원리 말입니다. 우리가 죽어 보고 사는 것입니까? 우리가 사업을 할 때 다 경험해 보고 사업을 합니까? 우리가 다 살아 보고 결혼합니까? 아닙니다. 믿고 결혼하고 믿고 사업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실제로 그렇게 살면서도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는 유독 믿음의 원리로 대하려 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어는 전문가가 나와 채소가 좋다하면 무조건 채조를 먹고 조깅이 좋다 걷기 운동이 좋다하면 만보기가 없어서 못팔정도로 나가는데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아요.

이러한 사고의 구조로 보면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부활이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제자들의 신앙 고백적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 의하여 신화적으로 꾸며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신격화하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되지 못한 그 당시 사람들의 신앙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가설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기절설: 일시 기절했을 뿐이며 장사를 한 후 정신이 되돌아와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2)무덤을 찰 못 찾았다는 설: 어두운 새벽길에 잘 못 찾아서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이 부활힌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3)도난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옮겨 놓고는 부활했다고 거짓을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4)환상설: 부활이 없었는데 돌아가신 후 죄송한 뉘우침에 부활을 말하신 것을 굳게 믿고 심히 피곤하여 머리 속에 그리다가 마침내 환상을 보고서 이것을 실제인양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5)신비설: 바벨론 신화. 동방신화에 나오는 부활설을 예수에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했다는 것이 사기이고 환상이고 착각이고 꾸며낸 이야기이고 신화일까요? 기절하였다가 다시 일어났겠습니까? 확실한 증거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1)기절하였다가 다시 일어 낫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성경의 진리이면서 역사적 사실입니다. 빌라도도 빌라도 보고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가시면류관을 쓰셨고 책찍에 마졌으며 허리에 창을 받아 물과 피를 다 쏟았습니다. 그리고 세마포에 싸여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동굴이 서늘하여 무덤에서 원기를 회복하고 다시 일어 날 수 있었겠습니까? 설령 일어났다고 하여도 어떻게 동굴의 문을 밀고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마 27:62-66)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저희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이렇게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주님께서 무덤 문을 열고 나올 수 있겠습니까? 부활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2)여인들이 무덤을 잘 못 찾아가서 빈무덤을 보고 착각했겠습니까?

①예수님의 묘지는 공동묘지가 아니라 개인 묘지이기에 찾기에 쉬웠습니다.

②(눅23:55)여인들이 무덤의 위치를 미리 확인하여 두었습니다.

③(막16:2)해 돋을 때에 무덤으로 다시 베드로가 갔습니다. 이 외에 요한과 다른 여인들도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장소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판단 착오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3)제자들이 시체들 도둑질하여 옮겨놓고 거짓으로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렸겠습니까?

①그럴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잡히시던 현장에서 도망하고 주님을 부인하던 제자들입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 부활을 전했을 때, 믿지 않으려고 확인까지 하려던 제자들입니다.

②그들은 완전히 생활이 변하였습니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제자들 11명 전원이 순교하였는데 한결 같이 거짓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을 확실히 믿은 신앙만이 순교의 자리까지 제자들을 인도하였습니다.

③가능성이 없습니다. 가야바가 시체 도난을 막도록 특별히 경계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④로마 황제의 인봉(마27:66)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허락없이 때면 사형입니다.

4)예수님을 너무 그리다가 그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고 헛소리 한 것입니까?

①유령이 아니라 실제로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눅24:13-35)

②도마에게는 상처를 만져보게 하셨습니다.(요20:28)

③떡과 고기를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눅24:39-49)

④ 여러 사람이 일시에 환상을 보고 실제적 사건으로 오인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일간 무려 11번 나타나셨고 갈릴리 지정된 산 위에서는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습니다.

5)예수님을 신화화하기 위한 기록이겠습니까?

부활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왜곡하여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였다고 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맨 처음 만난 사람이 베드로나 요한 같은 제자들이 아니고 죄인 취급을 받았던 막달라 마리아라는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빼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사도들이 두려움과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대로 기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을 정확합니다. 의심할 만한 사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람이 기록하였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고 기록하였기에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빌라도의 보고서'라는 이름을 가진 소책자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못박도록 허락하였던 당시의 유대에서 로마 황제로부터 보냄을 받은 총독이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때부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로마 황제에게 보내는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견 되었고 지금 터어키의 성 소피아 사원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보고서의 내용에 의하면 본디오 빌라도는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십자가 옆에서 <말커스>가 말한 것처럼 나는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장 큰 증거는 제자들의 생활의 변화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순교의 역사입니다. 죽은 다음의 생명을 분명히 믿은 제자들이 순교의 잔을 마신 뒤, 위대한 신앙인들은 순교의 길을 기쁨으로 알고 따라 나섰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이 보다 확실한 증거를 제시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삶들은 부활을 증거하였고(행4:2), 베드로는 부활을 말하지 말라는 사두개인들에게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 중에 어느 것을 듣겠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행2:14-36)

사도행전은 '부활의 복음서'라고 불릴만큼 부활이 확증하고 있습니다.(2:23, 32,3:15, 26, 4:10, 33, 5:30, 10:40, 13:30-34, 17:31)

더욱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누구 보다도 예수님의 가족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마13:55-56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이 식구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요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막3:21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목격하고 변하였습니다 행1: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확실히 부활하였습니다.

옥스포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토마스 애놀드는 말하기를 "나는 여러 해 동안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사실을 조사하고, 이에 대하여 기록한 문헌과 유물을 고증하여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오는 중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표징, 곧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인류사에서 나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로슈 멕도르씨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지금까지 사람들을 속여 오던 일 중에서 악랄하고 비도덕적이고 비양심적인 위선 중에 최대의 위선이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인류 역사상 가장 기적적인 사건일 것이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2. 도마는 부활의 증거를 보고야 믿었는데 우리는 그런 증거를 보지도 않았는데도 부활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셨습니다.(28-29).

이것이 은혜이고 복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그많은 기적을 보았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본고로 본 것만을 믿으려 했다면 결코 있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엄청난 선물입니다.

어느 부흥사 목사님이 시골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답니다. 마을의 건달 몇 명이 집회 시간마다 나타나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고 합니다. 마을에서 주먹깨나 쓴다는 건달은 "누가복음 대신 내가 복음을 믿으라"며 악다구니를 퍼부었답니다. 옛날에 한 주먹 했다는 부흥사는 인내심을 갖고 꾹 참았답니다. 그런데 집회 마지막날 기어이 사고가 나고 말았답니다. 그날따라 건달은 술까지 거나하게 취해 예배당에 들어섰답니다. 건달은 강단을 향해 삿대질을 해댔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밥이 나오나?" 부흥사의 야성이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답니다. 부흥사는 서서히 강단에서 내려왔습니다. 교인들의 눈은 부흥사에게 집중됐습니다. 부흥사는 건달을 단 한방에 때려뉘었답니다. 시골 건달인 동네 청년은 과거 도시 건달이었던 부흥사와는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청년들은 부들부들 떨며 애원했답니다. "아이고, 형님 나좀 살려주시오" 부흥사는 건달의 멱살을 잡고호통을 쳤답니다. "예배를 방해하는 놈은 용서할 수 없다. 예수 믿을거야 않믿을 거야. 예수 믿을래 한 대 더 맞을래. 예수 믿으면 용서해 주겠다" 건달들은 싹싹 빌으며 믿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한 마디 하는데 까불지 말고 믿어 하고 강대상에 올라가더라는 것입니다.

까불리 말고 믿으라고 한다고 믿어지겠습니까? 믿는체한다고 믿어지겠습니까?

믿음은 세 가지의 믿음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가 있습니다.

1)본능적인 믿음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믿음입니다. 개연성, 상식에 의하여 생기는 믿음입니다.

내일 아침에 해가 뜰 것입니다. 내일 죽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밥을 주는 것에 독이 들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집이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2)이성적인 믿음입니다. 과학적 사고에 의한 믿음입니다. 경험해 보고 증명해 보고 믿는 믿음입니다. 과학이나 경험을 통하여서 믿어진 믿음입니다.

3)영적인 믿음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천국을 믿고, 영적인 것을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것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후3:2)"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오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에 의하여 영적인 새생명이 있는 사람만이 가지는 신비한 것입니다. 기적입니다.(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고전 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므로 이 믿음을 가진 자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요20:29)"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3. 이 믿음은 말씀을 통하여 주어집니다.(30-31).

우리가 이 믿음의 복을 누리기 위한 딱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말씀을 듣고 보는 것입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물론 말씀을 듣는 다고 다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그 말씀 가운데 역사해야 합니다. "(고전 12: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부활의 믿음을 갖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고 보는 것 밖에 없습니다. 부활의 신앙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주일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어린이 여러분! 성경에는 뭐가 들어있을까요? 그 때 한 꼬마가 손을 번쩍들더니 대답하기를 네. 우리 형 성경 안에는 애인 사진이 들어 있어요.

성경 속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오늘 성경 말씀 31절을 보십시오. 주님이 있습니다. 믿고 생명을 얻게 하기를 원합니다. 풍성한 생명을 얻기를 원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없지만 이 말씀을 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다윗, 시18: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고백. 욥은 욥42:2,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겠아오니."

이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약속해 주시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1)영생의 복을 받습니다.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2)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3)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요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4)기도응답을 받습니다.

(마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5)병 고침을 받습니다.

(막5: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약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6)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막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7)능력을 행할 수 있습니다.

(막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요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8)소원을 이룸니다.

(마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9)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습니다.

(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10)마귀의 유혹과 공격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엡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1)세상을 이깁니다.

(요일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12)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3)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벧전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참으로 부활의 믿음을 가진 자가 복된 자입니다. 부활의 믿음으로 영생의 복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심판에 이르지 않기 바랍니다. 기도응답을 받고, 병 고침을 받으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부활의 능력을 행하고 소원이 이루어져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길 바랍니다. 마귀의 유혹과 공격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고 복음으로 세상을 이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진 자에게 이런 행복을 주실 것을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믿음은 최대의 복입니다./요한복음 20:24-31/김필곤 목사

▣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본 문 : 고전15:50-58

미국의 한 때 유명한 설교자였고 목회자였던 아이언 사이드 박사가 어느날 마을길을 지나가다가 항상 열려 있는 어떤 상점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이 집에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자세히 봤더니 창문 밖에다 다음과 같이 써 놓았더랍니다. '내부 수리중' 그 후 여러 날 동안 그 가게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내부 수리중' 이라는 팻말만 붙어 있었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인가 가게문이 활짝 열려서 들어가 봤더니 가게 안이 얼마나 멋지게 장식이 되었는지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들어가는 손님들마다 아주 기분 좋게 물건을 사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내부 수리중인 것과 같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이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변화되는 부활의 날까지 내부 수리중 팻말을 걸어 놓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 사람들로부터 가장 존경받고 있는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여러분,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그 신문 기사를 믿지 마시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주소를 옮긴 것뿐이오.'라고 말했습니다. 왜 죽음을 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또다른 시작으로 받아들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실낙원의 저자 밀턴은 '죽음은 영원한 하나님나라 궁전의 문을 여는 열쇠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성도님은 사람이 죽으면 예수님 재림 때 부활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부활할 것을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기적하였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도둑질하였다가 거짓 소문을 내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환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겠습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이 부활을 증거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순교를 하였고 그 후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이 부활을 증거하다가 순교했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위해 죽은 사람은 더러 있지만 거짓을 위해 이렇게 죽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부활을 확실히 목격했고 부활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은 후에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일까요? 우리나라 만해도 한해에 25만명이 죽습니다. 교통사고로만 하루에 26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이들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일가요? 아닙니다. 심판으로 부활하든 상급으로 부활하든 다 부활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29)"

그러면 우리가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어떤 일을 당하여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더욱 견고해져야 합니다.

5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라는 말은 부활을 말씀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고 우리의 부활이 확실하니 이렇게 살아라는 교훈입니다. 부활장인 15장의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고린도시는 타락의 도시입니다. 코린티아 조마이라는 말은 고린도 사람처럼 행한다는 말인데 매춘행위를 행하는 사람을 칭하는 말입니다. 교회내 파당문제가 있었습니다(1:11). 도덕적 타락(5; 6:9-20) 결혼, 음식, 예배, 부활에 대한 그릇된 사상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1세기 교회가 그렇듯 갖은 핍박과 고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부활을 믿는 신앙인으로 먼저 흔들리지 말고 부활신앙에 견고하게 서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당하면 신앙이 더 좋아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신앙이 더 나빠져 타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정한 친구를 어려울 때 알아 볼 수 있듯이 진정한 신앙인도 어려울 때 알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지 못하는 지 알 수 있는 것은 시험을 볼 때입니다. 건물이 튼튼한지 튼튼하지 않은지 평소에는 잘 모르지만 폭풍이 불고 지진이 일어나면 알 수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을 통하여 신앙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모든 것이 잘 될 때도 흔들리지만 잘 안될 때도 흔들립니다. 가장 흔들리기 쉬울 때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죽음을 맞이할 때입니다. 니체같은 사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 믿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냐고 질문하면 신앙적 회의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냐고 원망하며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51절에 보십시오. 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도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부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움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신앙이 흔들리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부활신앙이 더 성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신앙의 인물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고난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고난 가운데 신앙이 더욱 성숙하며 하나님 의지하고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어릴 때 부모를 떠난 사람입니다. 살인자로 몰려 왕궁에서 쫓겨난 사람입니다.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백성이 잘 따라 주지 않았고 여러 차례 위협을 당한 사람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형제들에게 인신 매매되어 다른 나라에서 종살이 한 사람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갖혀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얼마나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까?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들은 그 고난에서 신앙이 더 떨어진 것이 아니라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신앙이 더 성숙해졌고 신앙 안에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았습니다. 욥을 보십시오. 동방의 최고 부자였습니다.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루 아침에 그 모든 소유물은 없어졌습니다. 어느날 졸지에 폭풍으로 7남 3녀 다 죽었습니다. 자신도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이 때 욥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 1:21-22)"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만 의지하는 성숙한 신앙으로 발전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5)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6)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7)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29)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0)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1)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2)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 6:34)"

2.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부활할 것을 확신을 가지면 주의 일에 힘쓸 수 밖에 없습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고 하는 책을 쓴 모리 교수는 운동세포가 파괴되어 가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네. 만일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사람들은 금방 딴 사람이 될 걸세.'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이 죽음 후에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인생의 방향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계의 유명한 수학자요, 과학자요, 철학자였든 파스칼은 팡세에서 "천국! 이것은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도박이다! 그냥 우리가 포기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어마어마한 이것은 도박이다." 파스칼은 수학자이니까 계산을 했을 것입니다. "천국이 없어도, 천국을 믿고 살았든 나에게 별로 손해볼 것은 사실은 없다. 그러나 천국이 정말 존재했다면, 준비만 했었으면 갈 수 있었든 천국, 그런데 그 천국을 내가 놓쳐버렸다면 이것은 큰일이다. 이것은 놓쳐버리기에는, 이것은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어마 어마한 도박이다."

사람들은 흔히 죽음을 인생의 끝이라고 말합니다. "죽으면 다 끝났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아니가 세상에 나오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모태의 삶은 끝이지만 새로운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끝이지만 또다른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벌레가 고치가 되고 고치가 다시 나비로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을 죽음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죽음에 관한 최대의 연구가는 하바드대의 정신의학자였던 엘리자베스 퀴버라스라는 학자라고 합니다. 그분의 팀들은 소위 죽음에 가까운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연구했습니다. 죽었다가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들, 죽음의 상태를 체험한 사람들의 의식 세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했습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모두다 긴 터널을 통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부류의 사람은 아주 끔찍한 고통을 경험했고 한 부류의 사람은 환한 빛의 세계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빛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은 다시는 돌아오고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죽음 후에 부활이 있습니다. 죽음 후에 천국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 죽음으로 끝나는 일에 억메이지 않고 죽음 후에 부활로 이어지는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일입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한다고 주의 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힘쓰고 애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긴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부활을 확신한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어려움이 있을 때 어떤 자세로 살아갑니까? 그분이 죽음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고 기록한 디모데후서 4장을 보십시오. 6절 이하는 보십시오. 같이 일어 보겠습니다. 주님의 일을 적당히 하는 것과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힘써 일하는 것은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만을 이루고 죽어야 한다는 사명감 말입니다. 이 일을 위해 주님께서 나를 이 땅에 태어났게 했다고 생각하면서 일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해도 사명감을 가지고, 사업을 해도, 공부를 해도, 자녀를 양육해도, 부모를 섬겨도, 기도를 해도, 전도를 해도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합니다.

모든 일의 일꾼은 세 종류입니다. 첫째는 자신을 위하여 일하는 자, 둘째는 일을 위하여 일하는 자, 셋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자입니다. 사명자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것이 자신을 위한 일이 되고 일이 잘 되어 지게 되어 있습니다.

서울 합정동에 가면 한국기독교선교기념관이 있습니다. 이땅을 '복음의 땅끝'으로 알고 찾아왔다가 숨진 10개국 395명의 선교사들이 묻힌 곳입니다. 양화진에 자리한 기념관은 지금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은혜 보답의 차원에서 이곳에 외국인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안락한 삶을 마다하고 한국을 찾아온 벽안의 선교사들. 그들은 부활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죽음을 초월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풍상에 씻겨 흔적을 알아보기 힘든 빛바랜 묘비명들이 적혀 있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A. K. 젠슨). "나에게는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해도 그 모두를 한국을 위해 바치리라"(R. 캔드릭). A. R. 아펜젤러 선교사의 묘비명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언젠가 이 땅을 떠날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명이 무엇입니까? 힘쓰고 애써서 이루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사명자 바울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그 주변에서 떠날 때 그의 자세를 보십시오. 원망합니까? 주의 일에 더욱 힘씁니다. 17절을 읽어 보십시오. 골로새서 1장 28-29절을 보십시오.

3.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수고하는 것 중에는 헛된 것들이 있는 반면에 영원히 헛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고전 15:12-19) 이 땅에서 하는 모든 것은 허무한 것일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 버리는 공허한 것일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된다고 말씀합니다.(17),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만다고 말씀합니다(14,17). 모든 사람 가운데서 우리는 더욱 불쌍한 자가 된다(19)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음으로 내세가 있음으로 천국이 있음으로 주님을 위한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죽는 죽음은 그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는 죽음일지라도 복있는 죽음이고 영광스러운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42)"

"(고전3:8)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갈6: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 10:41)"

마태복음 25장 34절 이하를 보십시오.

우리가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수고하는 모든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면류관을 약속하고 있습니다.시험을 참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약1:12). 사명을 다 감당한 사람에게는 의의 면류관(딤후4:8), 믿음의 정조를 지킨 사람에게는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고전9:25), 순교자에게 순교자의 면류관(계2:10), 목자들에게 영광의 면류관(벧전5:4), 영혼을 구원하는 자에게 기쁨의 면류관(살전2:19,20), 영적인 승리자에게 자랑의 면류관(살전2:19)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상급이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주는 댓가는 조그마한 것도 유치하지 않고 감사하다고 받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상급을 말하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날에 우리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너무나 추상화시키고 관념화시키지 마십시오. 어린 아이처럼 믿음을 가지고 사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눈물 흘리며 고생하는 것 언젠가 우리의 눈물을 씻어 줄 날이 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1.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어떤 일을 당하여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더욱 견고해져야 합니다.

2.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3.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고린도전서15:50-58/김필곤 목사

▣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본 문 : 행2:22-32

우리 교회 홈페이지 인터넷 유머란에 들어가면 재미있는 유머들을 성도님들께서 올려 놓습니다. 참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짜증나는 세상에서 우리가 웃으며 산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들 하나를 둔 어느 부부 집사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두 분다 부모님이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고 합니다. 교회에 다니며 집사 직분을 받았지만 열정적인 신앙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녔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집에서 식사할 때도 가족끼리 식사 기도하는 법도 없고 혼자 밥을 먹을 때도 기도하고 식사했는지 그저 했는지 자신들도 잘 모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물론 가정 예배는 한 번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오직 정성을 기울이는 것은 외아들 하나 잘 기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외아들 하나 잘 기르기 위해 공부에 정열을 쏟으면 아이를 볼 때마다 공부 이야기만 했다고 합니다. 아이가 교회에 갔다오면 빨리 오지 않았다고 야단을 치고, 교회에 갔다고 오며 물어 보는 것은 늘 "오늘 재미있었냐?"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머니가 주일학교를 마치고 집에 온 아들에게 오늘 뭘 배웠냐고 물어 보았답니다. 대단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들이 교회에서 무엇을 배웠는가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 때 어머니의 믿음을 잘 알고 있는 아이는 신이 나서 말했답니다. "오늘은 모세가 적들을 어떻게 이겼는지 배웠어요. 홍해에 도착해서, 모세는 다리를 건설해서 사람들을 모두 건너게 했대요.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건너자 그는 무전기로 본부에 연락을 해서 폭격기 지원 요청을 했죠. 폭격기는 폭탄을 떨어뜨려서 다리를 부쉈고, 적군들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대요." 그러자 어머니가 눈이 둥글 해져서 "아가, 선생님이 정말 그렇게 얘기하셨니?"라고 물었답니다. "사실은 아니에요. 하지만 선생님이 얘기하신대로 말하면 엄마는 못 믿을걸요?" 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믿는 것같이 보이는데 실제로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에 사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부활절입니다. 사망권세를 깨고 살아나신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는 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과 제가 죽은 후에 부활할 것을 믿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첫 번째 설교를 하면서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설교를 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행 2:36)" 하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으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지고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첫 번째 설교를 하는 베드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예수님을 따른 것 때문에 어려움이 오자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사람입니다. 고기 잡으러 고향으로 가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인생이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보십시오. 32절을 같이 읽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 2:32)" 이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시길 바랍니다.

왜 신앙생활하면서도 힘이 없고 능력이 없습니까? 왜 신앙 생활하면서도 기쁨이 없고 소망이 없습니까? 왜 신앙 생활하면서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예배에 참석합니까? 왜 신앙 생활하면서 아이들 학교 가는 것은 지각하지 않도록 열심히 깨우면서 주일에는 왜 예배를 빨리 시작하느냐고 불평합니까? 왜 신앙 생활하면서도 설익은 음식처럼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교회에 들여 놓고 늘 번민과 고민 가운데 살아갑니까? 이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나라가 있고 언젠가는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산다는 사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까? 비평의 원리, 인과의 원리, 유추의 원리에 익숙한 인간의 사고틀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성경의 말씀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지 않고 신화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문이 말하면 잘 믿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어는 전문가가 나와 채소가 좋다하면 무조건 채소를 먹습니다. 건강에 걷기 운동이 좋다고하면 만보기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불티나게 팔립니다. 건강에 비타민이 좋다고 하면 약국에 비타민 사는 사람들이 줄을 섭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나오는 이야기는 잘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믿기를 망설입니다. 아내의 말은 잘 믿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습니다.

어느날 공처가를 애처가로 훈련시키는 기독교 가정 세미나가 있었답니다. 강사는 먼저 그들이 진정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그렇지 않는 사람인지를 시험하기 위해 문제를 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오른 손을 들고 그렇지 않는 사람은 손을 들지 마십시오. 대부분의 사람이 오른 쪽 손을 번쩍 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손을 들지 않고 있었습니다. 강사가 이상하여서 다가가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까?" 그 때 마누라 무서워서 교회를 따라다니는 그분이 말했습니다. "오늘 제가 아침에 나오는데 마누라가 절대로 남자가 많은 곳에 가지 말라고 지시했거든요" "남자들이란 모이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니까? 피하라고 엄히 말했거든요" 그런데 한 사람이 오른 손을 올렸다 내렸다하며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강사는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내려다 올렸다 하고 있습니까? "저도 잘 몰라유, 아침마다 집을 나올 때 마누라한데 오늘 할 일을 다 지시를 받고 나오는데 오늘 아침은 제가 늦잠을 잔 바람에 지각을 할까보아 서둘러 나온 바람에 마누라한테 지시를 못받았구먼유. 그래서 이렇게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니 잠깐만 기다려 주세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부활이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제자들의 신앙 고백적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 의하여 신화적으로 꾸며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신격화하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되지 못한 그 당시 사람들의 신앙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1)기절설을 말합니다. 일시 기절했을 뿐이며 장사를 한 후 정신이 되돌아와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2)무덤을 잘 못 찾았다는 설을 말합니다. 어두운 새벽길에 잘 못 찾아서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이 부활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3)도난설을 말합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옮겨 놓고는 부활했다고 거짓을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4)환상설을 말합니다. 부활이 없었는데 돌아가신 후 죄송한 뉘우침에 부활을 말하신 것을 굳게 믿고 심히 피곤하여 머리 속에 그리다가 마침내 환상을 보고서 이것을 실제인양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5)신비설을 말합니다. 바벨론 신화. 동방신화에 나오는 부활설을 예수에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했다는 것이 사기이고 환상이고 착각이고 꾸며낸 이야기이고 신화일까요? 기절하였다가 다시 일어났겠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했기 때문에 로마 군병들이 특별히 지켰습니다.(마 27:62-66) 그리스도는 가시면류관을 쓰셨고 채찍에 맞았으며 허리에 창을 받아 물과 피를 다 쏟았습니다. 그리고 세마포에 싸여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동굴이 서늘하여 무덤에서 원기를 회복하고 다시 일어 날 수 있었겠습니까? 설령 일어났다고 하여도 어떻게 동굴의 문을 밀고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여인들이 빈무덤을 보고 착각했겠습니까? 개인 묘지입니다. 제자들이 도둑질할 수 있겠습니까? 다 도망간 사람들입니다. 환상을 보았겠습니까? 한 사람이 본 것이 아닙니다. 500여명 이상이 보았고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 무려 11번이나 실제적으로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실망하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눅24:13-35) 도마에게는 상처를 만져보게 하셨습니다.(요20:28) 떡과 고기를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눅24:39-49)

예수님을 신화화하기 위한 기록이겠습니까? 부활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그것이 아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왜곡하여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였다고 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맨 처음 만난 사람이 베드로나 요한 같은 제자들이 아니고 죄인 취급을 받았던 막달라 마리아라는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빼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사도들이 두려움과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대로 기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성경이 신화화시키기 위한 책이라면 예수님의 족보에 창기를 집어넣겠습니까?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두 번이나 팔아 먹는 이야기를 기록하겠습니까? 성경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비록 사람이 기록하였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고 기록하였기에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가장 큰 증거는 제자들의 생활의 변화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이 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있겠습니다. 신약 성경에 부활에 대한 말이 40회 나옵니다. 그중 사도행전에 10회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삶들은 부활을 증거하였고(행4:2), 베드로는 부활을 말하지 말라는 사두개인들에게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 중에 어느 것을 듣겠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행2:14-36) 사도행전은 '부활의 복음서'라고 불이울만큼 부활을 확증하고 있습니다.(2:23, 32,3:15, 26, 4:10, 33, 5:30, 10:40, 13:30-34, 17:31) 그들은 부활을 증거하다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도 하였고 톱으로 켜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고, 사자에게 물리고, 화형을 당하고 갖은 고난을 다 겪으며 순교당하였습니다. 거짓을 위해 그렇게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까?

더욱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누구 보다도 예수님의 가족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요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막3:21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목격하고 변하였습니다 행1: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확실히 부활하였습니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합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만약 부활이 거짓이었다면 이렇게 오랬동안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살겠습니까? 지금도 지구촌에는 20억이 넘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그들이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부활절은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깨고 승리하신 날입니다. 인류에게 생명의 빛을 던져 준 날입니다.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신 날입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날입니다. 회의가 변하여 확신이 되는 날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변하여 평안이 되는 날입니다. 무능력한 삶이 변하여 능력있는 삶으로 향하는 날입니다. 증오가 변하여 용서가 되는 날입니다. 죽음이 변하여 삶의 소생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 사실을 믿으면 우리에게 대단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산다는 사실만큼 인류에게 희망을 주고 개인에게 혁명적 사건이 어디있겠습니까?

우리도 이제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부활의 증인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1. 부활의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는 자신이 경험한 바를 부활을 증언한 후(22-24) 바로 이어 다윗을 예로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미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30절 31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는 이 땅에서 죽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소망입니다. 26절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진 다윗의 신앙 고백을 보십시오. 마음이 기뻐합니다. 입술이 즐거워합니다. 육체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 있습니다. 영혼은 음부에 버림을 당하지 않고 썩음을 당치 않습니다. 28절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주 앞에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십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을 가진 우리는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다하여도 기쁨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기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고 살면 어떤 어려움에서도 기뻐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 나라를 바라보고 말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도 기뻐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 2:17)"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부활절 아직도 근심과 걱정이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 앞으로 부활하여 살 그 나라를 보고 기쁨이 회복되기기 바랍니다. 아직도 기쁨이 없습니까? 구기자 전설이라는 유머가 있습니다. 한국 남자들이 세상의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다 무기력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약 한 첩을 다들 잘 못 먹어서 라고 합니다. 그 약은 구기자라고 합니다. 구기자 한 잔 씩을 잡수어서 다 구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아내가 너무너무 근심이 되어 남편에게 뭘 하나 선물을 했답니다. 그러자 그 날부터 남편은 생기가 돌고 어깨를 피고 활기찬 삶을 살더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궁금해서 무엇을 먹였겠습니까? 물어 보니 [피자] 랍니다. 오늘 부활절입니다. 얼굴이 활짝 피고 기쁨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모든 근심 걱정 부활하신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근심한다고 머리 한치 자라게 못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마음 속에 내 마음 속에 있네 나는 기뻐요 정말 기뻐요 주 예수 사랑 기쁨 내맘에 ...."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6:22)"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면 그 누구도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2. 우리의 삶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이제 그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일평생 살았습니다. 24절 보십시오. 사망이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이 살리셨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 설교를 들은 사람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37절 보십시오. 마음이 찔렸습니다. 41절 보십시오. 3000명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42절 이하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부활의 공동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을 통해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으로 삶의 원동력을 삼겠습니까? 무엇에 끌려 살겠습니까?

지나온 과거에 억매여 인생을 허비하겠습니까? 우리는 과거의 산물이지만 과거에 갇힐 필요가 없습니다. 죄의식에 끌려 다니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원한과 분노의 쓴뿌리에 시달리면 살겠습니까? 아픔 상처로 원한을 품고 복수의 날만 기다리며 살겠습니까? 두려움에 끌려 다니며 살겠습니까? 물질의 욕심에 끌려다니며 인생을 허비하겠습니까? 인정받고자 하는 욕심에 끌려 다니며 인간의 노예로 살겠습니까? 잠시 잠깐 후면 우리의 인생은 끝이 납니다. 인생이란 풀의 꽃과 같은 것입니다.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자식에게 평생 붙들려 살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을 보면 끝없이 자식에게 얽매여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목회자들도 끝없이 자식의 종이 되는 사람들을 봅니다. 큰 교회를 이루어 놓고 말년에 자식의 종이 되어 교회 세습한다고 얼마나 주님께 욕을 돌리고 전도문을 막아버리고 있습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어느 큰 교회 장로님께서 천국에 갔답니다. 천국식당에 가서 앉아있는데, 30분을 기다려도 아무도 찾아와서 뭘 드시겠냐고 물어보지를 않더랍니다. 참다 못한 장로님은 지나가 버리는 한 종업원을 억지로 붙잡고 따졌답니다. "왜 물도 갖다주지도 않고 뭘 드시겠냐고도 물어보지도 않는거요? 천국에서 서비스가 뭐 이래요?" 종업원이 "장로님, 여기는 셀프서비스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러자 장로님이 "그러면 왜 저기 있는 사람들은 셀프서비스가 아니고, 종업원들이 서비스를 직접 하는거요?" "아 저분들 말입니까? 저 분들은 주방에서 열심히 일한 집사님들과 화장실 청소, 차량안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십자가를 지고 온갖 더러운 것을 감당했던 성도님들입니다. 저분들께서는 지상에서 서비스를 항상 남에게 베풀고 남을 잘 섬겼기 때문에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종업원의 이 말에 장로님은 다시 물었답니다. "그렇다면 저보다 조금 빨리 온 우리 교회 목사님은 어디에 있소? 보이지를 않는데..." 종업원이 말했답니다. "아 그 목사님요? 아들에게 교회 세습해 주었는데 '그 아들 한 번만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때를 써 지금 그 아들 보러 갔습니다. "

예수님 말씀합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 22:30)"

우리 인류는 한 가족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 자매된 사람들입니다. 너무 내 자식 내자식 하면서 죄지으며 근심 걱정으로 인생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초점을 맞추세요.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인생으로 증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가슴을 조금 넓게 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우는 문창모 장로님 1주기 추모 예배가 지난 3월 13일 원주에서 있어합니다. 사회장으로 치루어진 그이 장례식에는 추모객만 2000여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분은 북한에서 태어난 분이십니다. 죽음의 위기를 많이 겪으신 분입니다. 일제시대 때, 북한 공산당에게 죽음의 위기를 겪었고 남한에 넘어와 많은 고생을 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의사로서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세브란스병원장, 인천도립병원장, 국립마산결핵요양소장, 원주연합기독병원장 직을 맡아 봉사했습니다. 96세로 하나님 나라에 부름받기 까지 무려 의사로서 70년 동안 환자를 돌보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는 평생 사람을 살리는 일에 전념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나라를 잃었던 일제시대에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도 최근 의약분업으로 의사들이 휴폐업을 할 때도 묵묵히 소망을 가지고 환자를 돌보았다고 합니다. 오전 6시 부터 밤늦게 까지 병원에서 진료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의사면허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절대로 게으름을 피울 수 없지요. 잠못자고 울면서,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차비도 줘가며 참 열심히 환자를 돌봤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확고하게 있는 사람입니다. 소망의 사람입니다. 그는 간증 집회에 초청되어 갈 때 밤11시부터 새벽3시까지 집회를 인도하고 새벽에 원주로 와서 다시 진료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일본경찰에게 공산당에게 죽을 위기를 당하기도 하였지만 그 때 마다 하나님은 자신을 보호해 주어 "하나님께서 의사로 사용하시려고 살려주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환자를 돌 볼 때마다 부활의 복음을 전하며 소망을 주었다고 합니다. 10여 년 전에는 경찰관이 손을 묶은 채로 환자 한 명을 데리고 온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문장로는 치료를 마친 후 그를 꼭 붙잡고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지만 예수 믿고 회개해야 한다며 설득을 했다고 합니다. 다음날 경찰관이 찾아와 그가 밤새 소리 지르며 울었다며 무슨 약을 먹였냐고 물었답니다. 문 장로님은 신약과 구약을 줬다며 웃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 그 죄수환자가 사형집행장으로 가면서 “나는 지금 천당가는 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분은 자서전을 펴내며 ‘천리마 꼬리에 붙은 쉬파리’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보잘것없는 쉬파리도 천리마 꼬리에 붙어있으면 천리를 단숨에 날아갈 수 있듯이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이끌어 지금 이곳까지 올 수 있게 해주셨다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어려움이 있습니까? 고난이 있습니까?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슬픈 일이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우리에게 절망에서 일어나 소망을 가지시길 원하십니다. 오늘 부활에 대한 첫 번 설교를 한 베드로가 기록한 베드로 전서 1장 3절 이하의 성경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벧전 1:4)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벧전 1:5)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벧전 1:6)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7)"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살며 부활의 증인으로 한 평생 헌신하다가 주님 만났을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부활을 믿는 신앙인의 특권과 삶

벧전1:3-8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죽음의 죽음을 선포한 절기입니다. 나라적으로는 총선이 있는 주간입니다. 16대 국회가 많은 일을 하였지만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을 만큼 잘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지도자가 국민과 나라의 미래를 위해 일해야 할텐데 당리 당략과 자신의 선거 당선을 위해 초점을 맞추어 일한다면 좋은 지도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16대 국회의원 273명 중에 기독교인이 111명이나 되었습니다. 장로 14명, 권사 3명 집사 44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대동 소이했습니다. 16대 국회가 뇌물 수수로 검찰에 기소된 사람은 26명입니다. 이들이 받은 돈은 무려 1315억원입니다. 52명이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되었고 12명이 의원직을 상실하였습니다. 1인당 4년 동안 16억 3천 만원을 지원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4년 동안 근무시간은 하루 8시간으로 할 때 152일 근무했다고 합니다. 자녀 병역 면제율이 23.5%로 일반인의 10배 가량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 무엇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도자가 국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정치 지도자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 되면 안됩니다. 특권을 주었으면 그 특권을 가지고 특권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특권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면 안됩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본문에서 신앙인의 특권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이 주어진 특권과 부활을 믿는 신앙인의 삶의 자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부활로 주어지는 특권이 무엇입니까?

Ⅰ. 그리스도의 부활로 주어진 신앙인의 특권(3-5)

1. 거듭남(3)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첫 번째 누리는 특권은 거듭남, 중생, 새 생명 즉 죽지 않은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3절을 현대어 번역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헤아릴 길 없는 자비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거듭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어 영원한 희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벧전 1:3)" 다시 살아 나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거듭나는 특권을 주셨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 15:14)"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 15:17)"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어 보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살겟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거듭난 특권,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의 특권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십니까?

2. 산 소망(3)

죽음으로 끝나는 소망이 아니라 언제나 살아서 계속되는 산 소망, 생명있는 소망을 우리는 특권으로 받았습니다. 부활을 통해 죽음으로 끝나는 소망이 아니라 영원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첫열매가 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한다는 소망, 이 땅의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누리는 영생의 소망을 우리는 가지게 된 것입니다.

3. 기업(4)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는 천국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5절에 나온 것처럼 이 기업은 예비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 천국입니다. 이 기업은 (1)썩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부패하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침략자들에 의하여 황폐되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2)더럽히지 않습니다. 정결하다는 말입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3)쇠하지 않습니다. 시들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영원히 그 아름다움을 보존된다는 말입니다. (4)하늘에 간직한 것입니다. (5)성도만을 위하여 보장된 것입니다.

4. 능력으로 보호(5)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철저히 보호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완전히 얻을 때까지 우리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8)"

부활을 믿는 다는 한 가지 이유로 고향에서 쫓겨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잡혀 죽임을 당하던 때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베드로 전서가 기록될 당시 로마 황제들의 심각한 박해가 있을 때였다고 합니다. 네로 황제 때에는 기독교인들을 불태워 정원을 밝힐 정도였다고 합니다. 박해의 이유는 다양했습니다. (1)그리스도인은 식인종-내 몸, 내살, 내피를 마신다고 가르쳤음으로-성찬식에 대한 오해

(2)부도덕한 무리-아가페 사랑, 성적으로 부도덕하다고 했습니다.

(3)상업을 방해한다고 했습니다.-에베소 교회 은장색 파동(행19:21-24)

(4)가족 파괴주의자들이라고 했습니다.-신앙의 형제 중요시

(5)노예 도둑이라고 했습니다.-노예가 그리스도화

(6)반정부주의자 무정부주의자라고 했습니다.-황제 숭배 반대, 로마시를 불사른 사람들이라고 오해를 받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카타콤에 숨어 예배를 드려야 할 때였습니다. 지금과 같이 자유롭게 예배드릴 때가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자기의 생명을 담보로 해야할 때였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은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거듬남, 죽은 이 땅의 소망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 나라의 소망, 비록 이 땅에서 부활을 믿음으로 집을 잃고 기업을 잃고 고난을 당하지만 영원한 기업 천국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뿐 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확실하게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려운 환란과 박해 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그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Ⅱ.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신앙인의 삶(6-8)

1. 크게 기뻐하는 삶(6,8)

부활을 믿는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불로 연단하는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7). 믿음의 시련입니다. 시련은 순금과 가짜 금을 구별할 때 사용된 말입니다. 당시 의대생이 치르는 시험을 "시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이미지를 통해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당한 고통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6절 이하를 보십시오. 현대어 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어떤 사람들은 조소당하고 매맞고, 다른 사람들은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돌에 맞아 죽로, 어떤 사람은 톱에 두 동강으로 잘려 죽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버리고 풀려나기보다는 칼에 맞아 죽는 편을 택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양이나 염소의 가죽으로 변장을 하고 광야와 산을 방황하였고 동굴이나 토굴에서 숨어 살며 굶주림과 병과 학대에 시달려야 하였습니다. (히 11:36-38)

그런데 이런 박해 가운데 그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오히려 크게 기뻐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잠깐 근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생과 산소망, 영원한 천국, 확신한 보호의 특권을 분명히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늘 나라 상급을 받는 테스트로 생각했습니다. 금을 정련할 때 격는 과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당할 때 오히려 크게 기뻐했습니다. 불신자들은 절망하고 비관하고 자살하거나 운명에 맡기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기뻐해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오히려 교만과 허영과 명예욕, 정욕, 탐욕, 이기심, 세속의 욕심들이 제거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으로 기뻐합니까? 우리 번역에는 빠져 있지만 그것으로 기뻐합니다. 그것은 곧 구원입니다.

결국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7절에 보십시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앞에 설 때 인류 역사의 대단원이 내리는 날 그리스도 앞에서 영광과 칭찬과 존귀를 얻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런 즐거움으로 기뻐하였습니다(8). 잠깐 있다 없어지는 말초신경적 쾌락보다 영원한 영혼의 즐거움 영광스런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시련을 유익하게 만든 사람들입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이분들은 많은 시련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련으로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시련으로 오히려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신앙이라고 시련이 비켜가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이 다른 것은 시련을 당하되 그 시련을 유익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시련을 겪으면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욥은 얼마나 어려운 시련을 만났습니까?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시련을 받습니다. 그는 시련의 과정에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고 고백했습니다.

2. 예수를 사랑하는 삶(8)

그들은 갖은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예수를 사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면 두려움이 제거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8)" 제가 편집장 할 때 망우리 공동 묘지로 작품 사진을 찍으러 간 때가 있었습니다. 어둠과 밝음이 교차되는 시점을 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어둠이 몰려오는 시각에 청춘 남녀가 그 공동묘지에서 사랑을 속삭였습니다. 그것을 찍었습니다. 홀로라면 갔겠습니까? 사랑하니까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자꾸 사랑하니까 문제가 복잡해 지고 두려워 지는 것입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예수를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삶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사랑했기 때문에 흩어져 나그네가 되었지만 예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렇게 집을 잃었다고 자녀를 순교의 제물로 바쳤다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뜨겁게 사랑하였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자신들을 죄로부터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사랑이 고난의 강을 건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베드로가 배신하고 다시 어부로 돌아갔을 때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 보십시오. 세 번이나 사랑을 물어 보시면서 사랑의 동기를 회복시켜 부활의 증인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들은 그렇게 그 고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예수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원형 극장에 기독교인들을 잡아다놓고 굶주린 사자들을 풀어놓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찬송을 부릅니다. 그러나 달려오는 사자 떼들의 포효 앞에서 찬송 소리는 작아지고 무참히 사자의 밥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한 여인이 어린 자식을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 마구 입을 벌리고 달려오는 사자를 보자 어린아이는 무서워 웁니다. 어머니는 이 아이에게 말합니다. “얘야, 잠깐만 참아라. 곧 밝아질 것이다”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부활의 소망을 품고 죽음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허파에 산소가 필요하듯이 우리 신앙인을 생동적으로 살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3. 보지 못하나 믿는 삶(8)

핍박을 받으나 믿음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믿음이 결국 이기는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히브리서를 보십시오. 그 모진 핍박 가운데 이긴 것이 무엇입니까?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히 11:33)"

청교도 신학자 Thomas Watson이 말하듯이, "이성이 걸어갈 수 없는 곳에서도 믿음은 헤엄쳐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서는 받는 흩어진 나그네 같이 사는 교인들은 믿음으로 영혼의 구원을 받는 줄 확실히 알았습니다(9) 그래서 어떤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것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값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권력으로 그 어떤 것으로도 영원의 구원을 받지 못하지만 이 믿음으로 영혼의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주어진 특권을 이 땅에서 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 델리마쿠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로마에는 검투가 유행했습니다. 그는 검투사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잔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는 신앙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검투를 끝장내야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검투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잔악 무도한 검투는 끝낼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는 가슴을 찔려 죽으면서 외칩니다. "다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잔악 무도한 검투는 끝낼지어다." 그의 죽어가는 진지한 모습을 보면서 사람의 마음에 흥분이 사라졌습니다. 한 사람 두사람 떠나갔습니다. 그후 로마에서 검투 경기 살아졌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한 시대의 난제를 끝냈던 것입니다. 로마의 권력이 이긴 것같았지만 결국 로마 사람 1/5이 예수를 믿게되었습니다. 천년의 중세가 진행이 되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런 신앙을 가진 그들의 모습을 보면사 베드로는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편지를 쓰면서 첫 번째 찬송을 외치고 있습니다. 도망다니는 인생,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직장도 나갈 수 없고 부활을 믿는 것 때문에 이 땅에 즐겨할 인생의 모든 것을 포기한 인생을 사는데 무엇이 그렇게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산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확실한 구원을 얻도록 보장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부활절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까? 영원한 천국을 특권으로 받았습니까? 확신이 없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생, 썩지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은 산 소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기업을 특권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 나라를 바라보면 고난 중에서도 찬송하는 삶(3)을 살 수 있습니다. 박해 중에서도 크게 기뻐하는 삶(6,8)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랑하다 절망하고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사랑하는 삶(8)으로 활력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믿음 지키기 힘든 유혹의 세상에서 믿음의 삶(8)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의 특권과 삶/김필곤/열린교회/2004.4.11

▣ 부활의 증인

요한계시록1:17-20

로마 시대 때 기독교인들은 10번에 걸쳐 큰 박해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 박해를 한 황제는 네로 황제였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불태워 황제의 정원을 밝혔다고 할 정도로 잔인하게 신앙인을 처형하였습니다. 이 때 베드로 사도도 바울 사도도 순교를 하였습니다. 네로에 이어 두 번째 기독교인들은 잔인하게 박해한 황제는 90년부터 96년까지 핍박을 한 도미티안 황제입니다. 그는 정권 말기에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자신을 "주와 신"(Dominus et Deus)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의로운 신앙인은 황제 숭배를 반대하였고 황제 숭배를 하지 않는 신앙인을 잔인하게 처형하였습니다. 이 때 로마의 클레멘트가 순교하였고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요한은 복음을 전하다가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고 합니다. 이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어두운 밤,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잠 못 이루는 맹수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공포심을 자아내 감옥은 마치 지옥을 연상시켰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친형인 야고보는 제자 중 제일 먼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과거 자신은 예수님께서 왕국을 건설하면 적어도 국무총리나 내무부 장관 정도는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형은 가장 먼저 순교를 하였고 같이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의 끔찍한 순교의 장면을 보기도 하고 들어 알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권력욕도 있었던 사람입니다. 출세하여 잘 살고 싶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도 치맛바람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혁명을 일으켜 왕이 되면 자신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가 좌의정 우의정을 했으면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형은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순교를 당하였고 제자들도 다 순교를 당하고 이제 마지막 자신만 살아 남았습니다. 혁명으로 새로운 세상이 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이 티투스에 의해 멸망당했고 매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로 섬긴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끔찍한 일이 눈 앞에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몹시 괴롭고 인간적인 번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모진 고난과 아픔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하게 목격했고 다시 오시겠다는 말씀을 분명히 들었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데 수많은 신앙인이 신음하며 사자 밥이 되고 십자가에 달려 화형을 당하는데 예수님은 오시지도 않고 기적은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로마인들은 콜롯세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피흘리며 쓰러지는 잔인한 장면을 즐기기 위해 모였습니다. 팡파레가 울리자 관중들이 조용해지면서 도미티안 황제가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군중들은 환호를 보냈고 도미티안 황제는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자기 자리에 앉습니다. 잔인한 격투기가 벌어지고 경기가 끝난 다음에는 감금되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양의 가죽을 뒤집어 쓴 채로 경기장에 밀려 나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한데 뭉쳐 찬송하고 기도합니다. 그것도 잠시일 뿐 곧이어 쇠문이 열리면서 여러 마리의 굶주린 사자들이 뛰쳐 나와 사냥감을 발견하고 공격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순식간에 뿔뿔히 흩어지고 비명소리, 살려달라는 아우성 소리와 함께 하나 둘씩 사라져 갑니다. 감옥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신앙인들을 종일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이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땅이 갈라지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이면 신앙인들이 통쾌할텐데 아무런 징조도 없습니다.

이 때 같이 감옥에 갇혀 있던 사도 요한은 그들을 격려하며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에 많도다”라고 했습니다. “두려워 맙시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이 있습니다.” 밤에는 화형식이 이루어졌습니다. 경기장 안에 횃불을 밝혀 놓고 곳곳에 십자가를 세워 놓고 그 아래 장작을 쌓 놓았습니다. 형리들은 그리스도인들 수십 명을 십자가에 묶은 뒤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렀습니다. 로마인들은 조롱합니다. "너희들이 세상의 빛이냐? 더 빛나게 해주랴?" 하나님은 사도 요한을 그곳에서 순교를 당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도미티안은 요한을 밧모섬에 유배시켰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장자 더미의 불에도 펄펄 꿇는 가마솥에도 죽지 않자 유배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오늘 성경을 보면 도미티안에 의해 밧모섬에 유배된 것은 확실합니다. 언제 다시 불려가 화형을 당하거나 사자의 밥이 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도미티안의 박해가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신앙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집을 빼앗기고 가족과 이별하고 유리하다가 붙들려 화형을 당하는 것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아마 요한은 밧모섬에서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 때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요한에게 나타났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요한에게 나타났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초라한 모습이 아닙니다. 도미티안의 권력 앞에 떨고 있는 주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가 본 주님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① 발에 끌리는 옷을 입으신 제사장의 주님을 보았습니다(계 1:13). ② 가슴에 금띠를 띠신 왕이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계 1:13). ③ 그 머리털의 희기가 양털 같으신 영존하신 성결의 주님을 보았습니다(계 1:14). ④ 그 눈이 불꽃같으신 전지전능의 주님을 보았습니다(계 1:14). ⑤ 그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으신 심판의 주님을 보았습니다(계 1:15). ⑥ 그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으신 불가항력적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계 1:15). ⑦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시는(계 1:16) 교회 가운데 그의 사자들을 붙잡고 계시는 교회의 왕인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계 1:20). ⑧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계 1:16). ⑨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으신 영광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계 1:16).

이 모습을 순식간에 목격하고 요한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초자연적인 환상을 보고 두려움과 떨림에 압도되었습니다. 이는 계시를 받을 때 흔히 일어나는 모습으로(수5:14; 겔1:28; 단8:17; 10:15; 마176; 행26:14) 인간의 연약성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느끼는 두려움입니다. 일반적인 공포와 전율의 감정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 엄청난 장관 앞에서 사도 요한은 순간적으로 죽은 자 같이 되어 그 발 앞에 엎드러졌습니다.

이 때 죽은 자 같이 된 그를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해 주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오른 손을 얹어 모든 두려움을 제거해 주십니다. 그 오른 손은 권능의 손입니다.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못자국 난 손입니다. 힘있는 손, 일하시는 손, 일곱별을 붙잡은 손, 병든 자를 고쳐 주신 손, 어린아이 붙들고 기도하던 손, 부활하여 도마에게 보여주신 손, 증거와 권능과 능력의 손입니다. 그 손을 요한에게 얹으셨습니다. 이는 절망 가운데 있는 그를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고독한 그에게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이 날이 무슨 날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주의 날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믿음의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어 모든 것과 단절된 상태에서 고독하게 지내야만 했을 때입니다. 가야할 교회가 없고 같이 예배드릴 형제가 없는 때입니다. 만나야할 가족을 만날 수 있는 때가 아닙니다. 무인도와 같은 밧모섬에 홀로 유배되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두려움이 있는 때였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밀려오는 때입니다. 이 때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 주일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감동을 주었습니다(10; 4:2).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처럼 하늘의 세계를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심히 두려운 자에게 손을 얹으시곤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미 요한이 변화산에서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에게 손을 얹으시며 두려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 같이 된 자에게 다니엘처럼 근심이 더하고 힘이 없이 없어지고 호흡이 남지 않은 자같은 자에게 손을 얹어 주십니다(단10:15-18)

손을 얹으실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①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마 17 : 7, 계1 : 17, 단 10 : 19), ② 평

안하게 됩니다(단 10 : 19), ③ 강건하게 됩니다(단 10 : 18, 19), ④ 힘이

나게 됩니다(단 10: 19).

오늘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 주일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여하면서 밧모섬에 갇힌 요한처럼 앞 뒤가 막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같은 상황을 만난 분 있습니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고독한 무인도에 갇혀 있는 요한처럼 도움의 손길을 바라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죽음을 앞에 놓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 속에서 고민하는 요한처럼 사업 문제로 질병문제로 고민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에 성령에 감동을 받은 것처럼 성령의 감동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음성, 두려운 사람의 소리를 듣지 말고 “두려워 하지 말라”고 들려주시는 나팔 소리같이 큰 하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더럽고 추하고 고민스러운 땅의 세계만 바라보지 마시고 신비한 하늘의 세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능력의 오른 손을 얹으시는 예수님을 만나 ①두려움에서 해방되고 ② 평안을 누리고 ③ 강건하게 일어서 ④ 힘을 얻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왜 이렇게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 힘을 얻어 일어설 수가 있습니까?

요한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계속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요한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는 처음과 나중”이라고 말씀합니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역사를 시작하시고 역사를 끝마치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약하게 십자가에 돌아가고 끝이 난 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침묵하는 것같지만 아무런 힘이 없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8)” 곧 예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개인의 역사나 인류의 역사나 교회의 역사의 시작과 끝이 예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돌아가신 분이 아닙니다.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그저 종교의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셔셔 영원토록 살아계셔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시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단지 종교적 교훈을 하신 4대 성인 정도의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종교적 모델을 보여 주신 분이 아니십니다. 부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닦쳐와도 우리 주님과 함께 승리할 수 있습니다.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롬 8:37)”줄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오늘날 우리에게 도미티안 같은 정치적 탄압은 없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영상 문화가 우리를 죽은 자 같이 만들고 있습니다. 시대를 지배하는 재물이 우리를 초라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어가는 과학문명이 부활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번민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변해가는 지식이 부활을 믿고 따르는 우리를 시대에 뒤쳐진 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곳이 어디 일지라도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그곳에 함께 있는 줄 믿습니다. 철저히 단절되어 외로움과 절망감에 빠진 현장일지라도 살아 계신 주님은 그곳에 함께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에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살아계신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환란 가운데 침묵하시는 것같고 끝없이 이어지는 고통 가운데 외면한 것같지만 그 가운데도 우리 주님은 함께 하십니다. 요셉의 고난의 17년 동안에도 함께 하신 하나님, 다윗의 고난의 17년, 모세의 40년 광야 생활에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부활하시어 살아 계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이제 요한을 일으켜 세워 주시고 희망과 용기를 주신 우리 주님께서는 요한에게 무엇을 요구하였습니까?

19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기록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네가 본 것, 이제 있는 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본 것은 바로 1장의 내용이고 이제 있는 일을 바로 2-3장의 내용이고 장차 될 일은 4장 이후 마지막까지의 내용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 두려워 떨며 포기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독하게 밧모섬에 유배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같지만 지금 아무것도 없다고 포기하며 절망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 나이가 90이 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난지 60여년이 지난 때입니다. 어쩌면 인생이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밧모섬에 유배되어 그저 기도하며 바다를 보다가 인생을 마감할 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다른 사도들은 다 순교를 하였는데 자신만 늙기까지 홀로 남아 있는 죄스러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시면서 친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했는데 잘 돌보아 드리지 못한 죄스러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정작 너에게 중요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요한에게 주어진 마지막 사명이 있었습니다.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여 오는 세대에게 세세토록 전달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요한을 순교시키지 않고 노년에 이 외로운 밧모섬에 유배하게 한 하나님의 뜻이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여 무엇하라는 말씀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고난받는 핍박받는 아시아 7교회에 보내라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핍박가운데 쓰러질 교회가 아닙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 계시록을 기록하여 요한처럼 예수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케 하여 용기를 주고 소망을 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20절에 나온 것처럼 교회와 교회의 사자를 붙들고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지금 교회가 박해를 받고 지도자는 쫓겨나고 교회의 교인들이 다소간 흩어지고 위축될 수 있지만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최후 승리를 합니다. 새하늘과 새땅에 우뚝서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반석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셨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태16:18)"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부활의 증인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거하였습니다. 자기를 증거하고 자기를 드러내는 삶이 아닙니다. 자기 피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자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체험한 것을 증거합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증거하였습니다.

역사 속에 일어날 일곱 인 재앙, 일곱 나팔 재앙, 일곱 대접 재앙을 증거합니다.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건강으로 인하여, 나이로 인하여,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내 인생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는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해야할 사명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숨을 멈추는 순간까지 부활을 증거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에게 맡겨준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루어드려야 합니다.

지금 죽을 때가 아닙니다. 절망하고 낙심하며 누워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일어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지난 주 신문에서 “美 105세 CEO 승승장구”라는 기사를 읽어 보았습니다. 록마운트 랜치 웨어사의 최고 경영자 잭 웨일에 대한 기사입니다. 그는 지금 105세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출근하며 최고 경영자의 자리에서 뛰고 있답니다. 기자가 그렇게 유명한 영화배우나 정치인들에게 옷이 인기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웨일씨는 "경쟁자들이 이제는 모두 무덤 속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말했답니다. 라면 창시자 닛신식품 회장의 글도 보았습니다. 지금 97세입니다. 년간 2조 5000억원 매출의 일본1위 라면업체의 현역 CEO로입니다. 지금도 회사에서 맨 먼저 출근한다고 합니다. 아직도 오사카 본사에 가장 먼저 출근해 신제품 개발까지 직접 챙긴다고 합니다. 세계라면협회(IRMA)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그야말로 라면 전도사였습니다. 파산하고 빈털터리가 되자 자기 집에 3평 남짓한 실험실을 차려놓고 48세 늦은 나이에 사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도 하루에 한 끼씩은 나면을 먹으며 "죽는 날까지 라면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 것을 기사에서 읽어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런데 우리는 부활을 믿는 영원한 천국을 믿는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포기하지 말고 이루어야 합니다. 나이들었다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윈스턴 처칠은 76세 때 수상에 다시 올랐고, 78세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씨바이쩌는 77세에도 자신의 이념을 성취하기 위해 집념을 불태우다가 77세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찰즈 맥코이 목사는 71세에 중국 선교사로 새출발하여 86세에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15년 간을 중국의 아편 중독자들을 위하여 사랑을 쏟았습니다. 타티안은 98세에 그의 거작 "르판트의 전쟁"을 그렸으며 미켈란젤로는 80이 넘어서 그의 대작을 만들어 냈습니다. 아브라함은 90세에 가나안을 찾아갔으며 모세는 80세 때에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80세가 넘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였습니다. 85세가 된 갈렙은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며 평안히 안주하기보다는 아낙 자손이 진을 치고 있는 땅을 정복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여호와께 의지하며 나아가 승리하였습니다.(수14:7-12)

조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명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골드스미스는 8년만에 거의 무일푼에서 백만 파운드의 자산을 보유한 사업가로 변모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미다스 메소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강조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으면 가능성도 없다고 합니다. 불신과 의심이 인생의 성공을 가로 막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행복과 성공 비결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며 믿음을 가진 자가 세상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기적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공의 비밀을 아주 간단한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2) 자신이 그것을 가질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믿기 (3) 자신이 그것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믿기 (4) 실행에 옮기기 ”

그는 말하기를 성공 비결의 75%는 믿음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성공도 이렇게 믿음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해야할 일이라면 믿음을 가지고 하여야 합니다.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이라면 사명감을 가지고 열정으로 하여야 합니다.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는 젊을 때 방직공, 증기기관차 화부, 우편배달원 등 많은 직업을 거쳤습니다. 믿음의 사람 카네기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어떤 직업을 갖고 있든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고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장애물은 있는 것입니다. 좋은 것일수록 장애물이 많은 것입니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 PGA에서 우승한 프로 골프 선수 신앙인 최경주는 고등학교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운 그가 골프를 시작했을 때 모두가 비웃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골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타석이 비는 틈을 이용해 골프 연습을 했고, 무리한 연습으로 손이 갈라져도 일어서 PGA에 진출해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고통은 꿈을 이루기 위해 잠시 거쳐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가나안 땅을 가려면 홍해도 건너고 요단강도 여리고도 넘어야 할 것들입니다.

단편소설의 거장 오 헨리는 300여 편의 위대한 작품을 남긴 에너지의 원천이 3년간 감옥에 있었다고 합니다. 작가 찰스 디킨스은 너무나 가난하여 학교를 거의 다니지 못했고, 열두 살 때부터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무서운 빈곤과 비인도적인 노동, 비극적인 첫사랑의 아픔을 앓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름이 되어 뛰어난 작가가 되었습니다. 내 안에 숨어 있는 사명감을 깨워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믿는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반드시 이룰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20절 다시 보십시오. 결국 교회가 승리하게 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리 주님이십니다. 도미티안은 이 말씀을 받은 후 1년 후에 죽었습니다. 앞으로 역사는 전혀 모르지만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 우리 하나님이 사명을 이루도록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홍해가 어떻게 갈라질지, 요단강을 어떻게 건널지 모릅니다. 여리고 성이 어떻게 점령될지 모릅니다. 아이성이 어떤게 점령될지 모릅니다. 우리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붙들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이 부활의 능력으로 홍해도 가르시고 요단강도 건너게 하시며 여리고와 아이도 무너뜨리게 하실 것입니다.

2006.4.16/열린교회/김필곤 목사

▣ 부활을 믿습니까?

막12:18-27

우리는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조금만 어렵고 고난이 다가오면 부활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죽음보다 더 힘든 삶의 고통을 이기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레나 마리아라는 가스펠 가수입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두 팔이 없고 한 쪽 다리가 짧은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을 이기고 가스펠 가수로 세계인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세계 언론은 그녀의 목소리를 “천상의 노래”라고 격찬했습니다. 그녀의 인생을 담은“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는 초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중증 장애인이지만 세계 장애인 수영 선수권 대회에서 4개의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녀는 자신은 부활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까지 사흘 동안 무덤에서 기다렸듯이 자신 역시 태어나서 엄마, 아빠를 만나기까지 사흘이 걸렸다고 합니다. 최소한 이십 년 동안은 돌봐야 '겨우 죽지 않고 살 수'있다고 생각한 의사는 부모가 안정될 때까지 신생아실에 둔 채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태어날 때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지만 아버지는 울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 자신의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우리 레나 요한슨을 책임져 주십시오. 이제 당신의 자녀로 드립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육체에 대해 불평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공연을 했을 때 일본 텔레비전에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사회자가 "레나, 당신은 왜 그렇게 밝을 수 있죠?"라고 물었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삶을 움직이고 계시며, 내가 필요한 것을 채우시며, 또 내 곁에서 나를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시니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누군가 내게 '주님이 살아 계시고, 부활하셨다는 증거'를 대라고 말한다면 “나는 나의 약한 육신과 날마다 찬송하는 내 입술을 당당하게 보여줄 것입니다.”

이들을 이렇게 살게 한 힘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진정 예수님께서 역사적으로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교회에 다니면서도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활은 그저 신화적 사건이고 신앙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예수님은 여러 차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막 8:31)"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 당시 대제사장과 제사장 직을 맡았던 사두개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읽어 보세요.

1. 왜 부활을 믿지 못합니까?(18-23)/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대한 질문

24절을 읽어 보십시오. 예수님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부활을 믿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사람은 부활할 수 없다고 믿고 있는 증거로 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성경을 들어 부활이 없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드는 성경이 무엇입니까? 19절을 보세요. 모세의 율법입니다. 모세 오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은 사람들입니다. 역사서나 시가서나 선지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토라에 부활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으니까 부활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으면 끝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과 육체가 함께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영생, 내세, 천사의 존재, 영을(행23:8) 믿지 않습니다. 최후 심판날 죽은 자들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죽은자와 하나님과의 관련성 제거(행23:8)시켜 버렸습니다.

그들이 부활이 없다는 증거로 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19절 이하를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수혼법을 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계대 결혼(신25:5-10)입니다. 형이 형수에게서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형 대신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주는 수혼제도입니다. 형사취수(창38:8; 룻3:9-4:12) 제도입니다. 이런 제도는 앗시리아, 힛타이트와 가나안 국가에도 있었던 제도입니다. 그들은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이런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방인과 결혼을 방지, 가족 부양, 재산 상속, 가문과 기업 유지 등을 이루기 위해 허용한 제도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크게 나누면 제사법과 시민법과 도덕법이 나옵니다. 제사법은 죄를 속하기 위해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시민법은 그 당시 사회 생활에 필요한 법입니다. 도덕법은 십계명과 같이 시대를 초월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계대 결혼은 당시 시민법에 속합니다. 일곱 형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첫째가 아내를 얻었다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혼법에 의해 둘째가 아내로 취했는데 둘째도 자식 없이 죽고, 셋째, 넷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까지 다 그렇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 여자도 죽었다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만약 부활이 있다면 부활할 때 이 여자가 그들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는 것입니다. 일곱을 다 아내로 삼았는데 일곱 명의 아내로 살겠냐는 말입니다. 부활이 있다면 모세 오경이 잘 못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부활한다면 부활 때 어떻게 이 말씀이 적용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부활은 허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시켰다는 것과 예수님이 부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부활은 초대교회의 신앙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와서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인간의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묻힌 지 사흘만에 부활하고 승천하고 재림하는 것 등을 모두 신화론적 진술이라고 이해해 버리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적 세계상과는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역사적 사실은 인정하지 아니하고 그 의미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활을 사건으로 보지 않고 해석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활을 사실로 보지 않고 신앙의 표현, 신앙 고백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창세기 21장 33절에는 하나님을 일컬어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 오경에 영생이라는 말도 나오고 천사라는 말도 나옵니다. 단지 그들이 믿지 않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가 지나버렸습니다. 경험과 인간적인 지식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아이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웃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창 17:17)" 사라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창 18:12)" 비웃었습니다. 어떻게 이일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기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신약에서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로마서 4장 18절 이하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죽은 것같은 사라의 태를 열어 주셨고 하나님의 때에 그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부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장 24절을 보세요. 아브라함을 통하여 바로 부활 신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24)”

또 보십시오. 이삭을 제단에 바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합니까? 이삭을 제단에 바치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이 신앙을 신약에서는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히브리서 11장 18절 이하를 보십시오.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히 11:18)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 11:19)” 그들은 모세 오경을 아전 인수격으로 해석하여 부활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구약 성경 전체를 모르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얼마나 많이 나타납니까?

모든 것을 잃어 버린 욥을 통하여(욥19:25-26), 시편을 통하여(시73:23-28) 호6:1-2; 13:14, 겔37:11-13, 단12:1-13 등에 부활 신앙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사26:7-21)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사 26:19)”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결국 무지 때문입니다.

레위기 18장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영생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비평의 원리, 유추의 원리, 상관의 원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이 대단하지만 또한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솝 우화에 하루 살이, 메뚜기, 개구리 우화가 있지 않습니까?

두 번째 는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기 때문입니다(24).

그들이 일곱 형제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질문한 것은 부활 때 죽기 이전 상태 그대로 부활한다는 것을 가정하여 던진 질문입니다. 인간적 상상력으로 부활한 자의 상태를 단정하고 그 근거로 부활을 부인하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2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어떻게 부활을 시키신다는 것입니까? 시집도 가지 않고 장가도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할 때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이 땅의 모습 밖에 모릅니다. 감각의 세계로 영적인 세계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까지 제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수혼법은 종족 번식을 위해서 세운 것인데 부활 때는 그것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으니까 부활 때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사와 같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세는 현세와 다른 삶이 존재합니다. 사두개인들은 내세와 현세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추론을 하는 것입니다. 내세에는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예속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부활시키십니다. 영화로운 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상식 수준으로 맞추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 오경에도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였습니다. 범죄한 사람들에게 홍수를 내려 심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홍해를 갈라 바다에 길을 내셔서 이스라엘 자손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셨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셨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였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부활을 못시키겠습니까?

죽음과 같은 인생의 상황에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 삶을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원일기', '그대 그리고 나'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텔런트 김지영씨가 있습니다. 교회 학교 선생님을 하는데 아이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거 사실이에요? 그걸 어떻게 증명해요?"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때 그녀는 바로 지금 살아 있는 내가 증거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혈관이 엉겨 붙는, 이름조차도 알 수 없는 아주 희귀한 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혈관이 한 데 엉켜서 혈액 순환이 제대로 안 되었고, 몸은 늘 퉁퉁 부어 있었답니다. 좋다는 병원은 다 가보았지만 "이대로 두다간 스무 살까지밖에 살지 못할 것 같군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때 그녀는 '아... 내가 죽다니. 내가 정말 죽는다고? 이건... 이건 말도 안돼...'라고 했다고 합니다. 의사들의 실험 대상이 되어 고통 속에서 살면서 그냥 죽게 해달라고 했답니다. 그 때 아버지가 방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지영아... 지영아... 자니?" 자는 체 했답니다. 아버지가 "하나님 우리 지영이 살려 주세요 지영이 살려 주시면 저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 아버지는 교회에 다니지 않을 뿐더러 어머니와 내가 교회를 갈 때마다 노발대발하며 화를 내시던 분이셨는데 딸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녀의 아버지의 기도를 들으셨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어 살아나 텔런트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부활할 때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천사와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부활할 때 정확히 어떤 몸이 될 줄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3:21, “그가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예수님처럼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요일 3:2)”

성도의 영화된 육체가 어떤 것일지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성경은 부활하신 주님의 육체와 흡사할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부활 이전과 동일성을 유지하여 도마와 제자들이 보아 알 수 있었으나 또 쉽게 알아 볼 수 없는 경우도 있었으며(눅24:16) 활동에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셨습니(요20:19; 행1:9,10) 성도의 육체도 부활 후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 육체는 다시 사망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않습니다(계21:4)

영혼은 임종시 완전 성화되어 천국에 이르나, 육신은 사망의 권세 아래에 놓여 썩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재림시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 15:51-53)”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4:16) 성도들의 부활은 썩지 아니할 육체, 곧 성화로운 육체로 부활할 것입니다.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20-21)”

2.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부활이 사실이라는 증명(26-27)

2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죽은 자의 하나님으로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첫째는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으로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눅20:38).

사두개인들은 살아 있을 때만 하나님이시고 죽어 버리면 하나님의 관계가 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만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평안과 위로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죽으면 다 끝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25:5,6을 들어 부활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똑같은 모세 오경인 출3:1-6을 들어 죽으면 끝이 아니라 하나님은 죽었어도 살아 있는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죽으면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땅의 삶은 이 땅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와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팔순의 모세가 양떼를 인도하여 호렙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신비한 광경을 본 것입니다. 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그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기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은 400년 전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죽음으로 하나님과 단절된다면 하나님이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영혼이 영원히 소멸되었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비록 아브라함이 육신으로는 죽어 무덤에 장사되었지만 그 영혼은 낙원에 살아 있음을 전제로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을(마17:) 통해서도 사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영원히 산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들은 육신적으로 죽었지만 영혼은 천국에 가서 살아 있기 때문에 모세 앞에서 이미 죽은 족장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들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족장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결론을 끌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사두개인의 죽었다는 말입니다. 죽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직업적인 종교인에 불과했습니다. 종교 의식을 거행할 뿐 제사를 받으실 하나님께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종교적인 특권을 이용해서 대접받고 잘사는 데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대제사장 사독(삼하8:17)을 직계 조상으로 생각하며 대제사장직을 계속 세습한 사람들입니다. 사실은 사독의 자손이 아니면서 사독의 자손 행세를 하는 당시 하스모니안 왕조를 지지하는 유대인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종교적이기보다는 정치적 성향이 강하고, 친헬라 정책을 지지하며 현실과 타협하였습니다. 최고 종교 재판소요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을 장악했습니다. 인간 중심의 현실주의 자들입니다. 인간의 만사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깊은 내막이 있었습니다. 부활은 사두개인에게 있어서는 정치적인 의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시 혁명적 가르침이었습니다. 부활을 믿기 때문에 로마에 대항을 하고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저항하고 순교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런 신앙을 가지면 결국 민족적인 혁명이 일어나고 결국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되기 때문에 부활을 애써 외면해 버린 것입니다. 이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습니다. 그들이 지배하는 성전에 와서 돈바꾸어 주는 사람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죽일까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죽음이란 분리를 말합니다. 세가지의 죽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죽음, 육적 죽음, 영원적 죽입니다. 육적인 죽음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 우리 영혼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영원적 죽음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바로 사두개인들은 영적으로 죽었고 영원적으로 죽은 인간들입니다. 이런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진정 고백하는 산자의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40)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가 산자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5)”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

로마서 8장 14절에 보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

죽은 자는 반응이 없습니다. 사두개인들처럼 세상일에 대해서는 해박하고, 상황에 맞게 판단을 내리고, 이익을 따라 민첩하게 반응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전혀 반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자는 예배에 감격이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체험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충만한 은혜를 체험합니다. 부활의 소망과 믿음의 능력, 사랑의 신비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송할 때 마음에 기쁨이 넘칩니다. 말씀을 볼 때 아멘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시행하면 삽니다.

부활을 믿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도전이 다가온다고 해도 부활의 신앙을 분명하게 증거하며 승리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8.6.22

▣ 부활의 소망으로 일어섭시다.

마가복음16:1-13

오늘은 주님께서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오늘 모든 불신과 슬픔, 아픔과 절망을 깨뜨리고 부활의 소망으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실까요?

1.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 신앙으로 죽음을 정복하고 소망으로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여인들은 슬퍼하며 애통해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10).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돌무덤 속에 갇혀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주일 새벽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갔습니다. 제자들은 집에 모여 슬퍼했습니다. 여인들이 찾아간 무덤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시체가 없었습니다. 시체를 찾는 여인들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예수님은 부활하였다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가두어 놓을 수 없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이 죽음을 정복했습니다. 죽음의 노예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어느 누가 죽음을 정복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죄의 값으로 찾아온 죽음을 십자가에서 다 지불하심으로 우리 인류를 죄로부터 해방시키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삯인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인류의 최대의 적은 죽음입니다. 누가 죽음을 정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이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우리도 부활 신앙을 가지면 죽음을 정복하고 소망으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닥쳐오는 죽음의 공포를 없애줍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예수님이 부활하였으니 우리의 부활은 확실합니다. 죽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이 있습니다. 죽음으로 끝이면 얼마나 우리가 불쌍한 사람이겠습니까? 우리는 죽음에 종노릇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초월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가복음을 처음 받은 로마 시대의 신앙인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로마 시대 때 기독교인들은 10번에 걸쳐 큰 박해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 박해를 한 황제는 네로 황제였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불태워 황제의 정원을 밝혔다고 할 정도로 잔인하게 신앙인을 처형하였습니다. 이 때 베드로 사도와 바울 사도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부활을 믿는 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양의 가죽을 뒤집어 쓴 채로 경기장에 밀어 넣었습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한데 뭉쳐 찬송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쇠문이 열리면서 여러 마리의 굶주린 사자들이 뛰쳐나와 사냥감을 발견하고 공격합니다. 밤에는 화형식이 이루어졌습니다. 경기장 안에 횃불을 밝혀 놓고 곳곳에 십자가를 세워 놓고 그 아래 장작을 쌓아 놓았습니다. 형리들은 그리스도인들 수십 명을 십자가에 묶은 뒤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렀습니다. 로마인들은 조롱합니다. "너희들이 세상의 빛이냐? 더 빛나게 해주랴?" 그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집을 빼앗기고 가족과 이별하고 유리하다가 붙들려 이렇게 화형을 당하고 죽어 갔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라는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로 격려하며 말했습니다."두려워 맙시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이 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믿고 증거하다가 화형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리고 짐승에게 찢겨 죽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살지 못하였고,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 믿음도 헛것, 금생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고전15:16-19)"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 죽음의 종말,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죽음을 정복하고 소망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면 우리도 죽지 않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주님 만난 사람들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살아났습니다. 주님이 나인성 과부의 독자를 장례하는 행렬에 나타나서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일어나라"(누가복음 7:14)고 말씀하시니 청년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섞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나사로야 나오라"(요한복음 11:43)고 부르시니 수족을 동인체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염려와 근심 걱정을 몰아내시고 평강을 주십니다(요한복음 20:19). 슬픔과 눈물로 냉냉한 가슴에 불을 붙여 주십니다(누가복음 24:32). 낙심과 좌절로 방황하는 자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요한복음 21:15-17).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죽음을 극복하고 절망에서 소망으로 일어납니다. 이 시간 예배드리면서 무덤을 찾지 마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소망 가운데 일어서시길 바랍니다.

2.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 신앙으로 불신을 정복하고 믿음으로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가 왜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까? 죽은 시체에 바를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11제자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13절에 보십시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증거해 주어도 믿지 않았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믿음이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었습니다. 증거가 부족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며 교만하고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 여인들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7절 보십시오.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라는 것입니까?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말씀대로 부활하였으니 말씀을 믿고 부활신앙을 가지고 슬퍼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 만날 소망을 가지고 갈릴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마 26:3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예수님은 여러 차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막 8:31)"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부활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첫째는 신화적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적 법칙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성과 경험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리주의자들은 그리스도는 부활한 것이 아니라 일시 기절했을 뿐이며 장사를 한 후 정신이 되돌아와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기절설). 마리아가 어두운 새벽길에 잘 못 찾아서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이 부활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빈무덤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옮겨 놓고는 부활했다고 거짓을 퍼트렸다는 것입니다(도난설). 부활이 없었는데 돌아가신 후 죄송한 뉘우침에 부활을 말하신 것을 굳게 믿고 심히 피곤하여 머리속에 그리다가 마침내 환상을 보고서 이것을 실제인양 퍼트렸다는 것입니다(환상설). 바벨론 신화, 동방신화에 나오는 부활설을 예수님께 적용했다는 것입니다(신화설).

둘째는 신앙 고백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제자들의 신앙 고백적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경에 일어난 일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지금도 사람이 부활하여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지 않으니 성경에 기록된 부활 기사는 제자들에 의하여 신화적으로 꾸며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진정 부활을 믿지 않을까요? 증거가 부족하고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이라 그럴까요? 예수님 말씀합니다. 14절을 다시 보세요. 믿음이 없고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지려면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말씀을 믿음으로 부활의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믿고 마가 다락방에 모여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부활은 과학의 대상이 아닙니다. 믿음의 영역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도 역시 역사 속에 일어난 단회적 사건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기록을 진실로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증거가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도 빌라도 보고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기절한 것이 아닙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잘 못 찾아가서 빈무덤을 보고 착각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묘지는 공동묘지가 아니라 개인 묘지이기에 찾기에 쉬웠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의 위치를 미리 확인하여 두었습니다.(눅23:55). 해 돋을 때에 무덤으로 다시 베드로가 갔습니다(막16:2). 제자들이 시체들 도둑질하여 옮겨놓고 거짓으로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렸겠습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잡히시던 현장에서 도망하고 주님을 부인하던 제자들입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 부활을 전했을 때, 믿지 않으려고 확인까지 하려던 제자들입니다. 제자들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하였는데 한결같이 거짓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부활 사건 이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믿고 증거하다가 화형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리고 짐승에게 찢겨 죽었습니다. 거짓을 위해 그렇게 죽었겠습니까?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갔던 베드로가 거짓을 위해 순교를 당했겠습니까? 예수님을 너무 그리다가 그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고 헛소리 한 것입니까? 여러 사람이 일시에 환상을 보고 실제적 사건으로 오인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일간 무려 11번 나타나셨고 갈릴리 지정된 산 위에서는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습니다. 확실한 증거는 부활을 목격한 예수님의 가족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요7:5) 미쳤다고 했습니다.(막3:21)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목격하고 그들의 삶은 변하였습니다(행1:14)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살지 못하였고,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 믿음도 헛것, 금생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고전15:16-19)"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인류 그 누구도 정복하지 못하는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셨습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이 부활의 사실을 확실이 믿고 불신과 불신으로 오는 걱정과 근심을 떨쳐 버리고 말씀을 전적으로 믿는 부활의 소망으로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더디 믿는 믿음(11, 12절. 눅 24:25-26)에서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파선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딤전 1:19-20). 넘어지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막 4:17). 연약한 믿음으로(롬14:1-3)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적은 믿음으로 늘 염려와 두려움, 의심과 회의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마6:24-34, 8:23-28. 14:30) 말씀으로만 얼마든지 믿는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칭찬하는 백부장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마 8:10).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축복하신 이방 여인과 같이 전적으로 말씀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마15:28). 청교도 신학자 Thomas Watson이 말하듯이, "이성이 걸어갈 수 없는 곳에서도 믿음은 헤엄쳐갈 수 있습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 신앙으로 두려움을 정복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첫 번째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무덤에 찾아간 사람들도 여인들입니다. 그렇게 장담하던 제자들도 다 떠나 버렸습니다. 당시 여인들은 사람 숫자를 셀 때도 넣지 않을 정도로 천대 받았습니다. 성전에 뜰도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구분해 놓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세 가지 감사 기도를 드렸답니다.첫 째는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둘째는 종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셋 째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여인들이 귀중하게 쓰임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엘리 제사장 때 민족의 암흑기에 한나는 기도하여 민족을 구원하는 지도자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에스더는 민족이 풍전등화의 어려움에 있을 때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각오로 민족을 사렸습니다. 드보라는 한 시대 민족을 위기에서 구출하고 이끈 여인으로 쓰임받았습니다. 요즈음도 결정적인 순간에 교회에서 여인들이 귀하게 쓰임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는 무엇을 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마리아가 가서 슬퍼하고 울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합니다.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본래 일곱귀신들렸다가 낳은 여인입니다. 정신이 오락가락한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여인의 증거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증인으로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마리아의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부활을 믿지도 않았고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사실도 믿지 않았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 남자 두 사람이 고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2 사람 남자의 증거는 완벽한데 그것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나서면 예수님께서 권능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부활신앙은 불완전한 믿음을 온전케 합니다. 부활신앙은 사단의 권세를 물리칩니다. 부활신앙은 신비로운 역사를 체험하게 합니다. 부활신앙은 실패자에게 소망을 줍니다. 제자들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인생이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 2:32)"

부활의 증인으로 살다가 수많은 오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네로 황제 때에는 부활을 믿는 신앙인들은 식인종이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성찬식에 대한 오해입니다. 부도덕한 무리라고 오해를 받았습니다. 아가페 사랑을 나누니까 성적으로 부도덕하다고 했습니다. 상업을 방해한다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가족 파괴주의자들이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노예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든다고 해서 노예 도둑이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황제 숭배를 반대한다고 해서 반정부주의자 무정부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목적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를 왜 예수님이 세웠습니까?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막 3:14-15)”라고 했습니다. 세가지입니다.

첫째가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가 전도하게 위해서입니다. 셋째가 영적권세를 가지고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능히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만드실 수 있으실 정도로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같이 못나고, 무능하며, 답답한 사람을 택하셔서 사용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을 볼 때 속좁고 소심하고 성급하고, 부족한 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 부활의 증인이 되길 원했습니다.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은 그 교회에 전도하는 교인이 없는 것입니다. 무장 해제를 당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을 무장 해제하는 것은 전도 관심 제거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의도를 보십시오.

제자를 부르실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였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 1:17)"

예수님의 오심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막 1:38)"

그리고 오늘 공식적으로 12 제자를 임명하면서 전도하게 하기 위해 임명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막3:14)

그리고 훈련을 시킵니다. 그들을 파송합니다.(막6:7)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막16:15)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 남긴 유언은 무엇입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그래서 그 전도의 명령을 12제자가 순종하여 이루어진 결과는 무엇입니까?

(1)삼천-행2:41 (2)남자 오천-행4:4 (3)심히 많음-행6:7 (4)남녀 세례-행8:12 (5)수가 많아짐-행9:31 (6)수다한 사람들-행11:21 (7)수만-행21:20이 돌아 왔습니다.

데이빗 왓슨 제자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매년 매일 밤에 1천명씩 그리스도께 인도한다면 전세계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데 몇 년의 세월이 필요하겠습니까? 인구 폭발을 고려하지 않아도 대략 1만년이 더 소요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 년에 한 사람씩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아 그들이 계속 인도한다면 몇 년 걸리겠습니까? 32년이면 된다고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9.4.12

▣ 부활로 말미암은 성도의 궁극적 승리

고전15:50-58

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고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장차 예수님 재림하실 때 부활합니다. 믿습니까? 포장하지 않고 진실로 믿습니까? 이 시대를 불신의 시대라고 합니다. 믿지를 못합니다. 거짓이 팽배합니다. 서로 믿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부부도 믿지 못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신사가 한 잔 걸치고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갑자기 강도가 튀어나와 길을 막고 섰답니다. "돈 내놔! 그렇지 않으면 각오해라!" "저. 돈. 돈이 없어요." "뭐야? 지금 장난해? 빨리 내놔!" "우. 우리 마누라는 불같은 여자예요. 집 근처에서 강도를 만났다고 하면 믿을 것 같습니까?" 그러자 강도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답니다. "아니 그럼, 내가 오늘 한 건도 못했다고 하면 우리 마누라는 믿어줄 것같냐?" 서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인간도 믿지 못하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부부도 믿지 못하겠는데 어떻게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겠냐는냐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말로만 믿는 채 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뻥이고 사기라는 것입니다. 저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전에는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지금은 부활을 확실하게 믿습니다. 우리 성도님은 부활을 믿습니까? 교회에 다니지만 아직도 믿어지지 않으신 분은 “예수는 역사다(리 스트로벨)”이나 “이래서 믿는다(폴 리틀)”라는 책을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도서실에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오늘 바울은 3,4절에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고전 15:3-4)“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성도의 궁극적 승리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습니까?

1)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을 정복한 완전한 승리를 누리게 됩니다.(54-57)

지금까지 인류가 극복하지 못한 최대의 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가장 두려운 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죽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마지막 남는 문제가 죽음의 문제입니다. 사망의 강력한 독화살 앞에 부자도, 권력자도, 미인도, 학자도, 젊은이도, 늙은이도 무너집니다. 누구도 죽음 앞에 예외가 없습니다.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초교파 외국 선교 연합회의 조사에 의하면 24시간에 32만 명이 출생하고 16만 명이 사망을 한다고 합니다. 매시간 7,000명 매분 120명, 매초 2명씩 사망을 합니다. 우리나라도 한해에 25만명이 죽습니다. 하루 685명입니다. 한시간에 28명입니다. 교통사고로만 하루에 26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누가 그 대상일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 그 죽음 앞에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건강했던 사람이 병원에 가 건강검진을 받고 죽음의 공포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죽음이 멀리 있었던 것 같았는데 죽음만 보이게 됩니다.

그렇게도 자유를 부르짖던 죽음을 초월하여 살듯했던 싸르트르도 사망을 두려웠했다고 합니다. 1980년 3월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서 죽음의 불안과 공포 때문에 병명도 묻지 않고 한 달동안 찾아온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죽어 갔다고 합니다. 권력으로 모든 것을 정복할 듯 살았던 마르크스도 사망을 두려워했습니다. 1883년 3월 14일 칼 마르크스가 사망하던 날, 그의 하녀가 다가와서 "저에게 당신의 마지막 말을 남기시면, 제가 기록해 두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마르크스는 "시끄러워, 나가 !" 라고 소리치며 죽어갔고, 나폴레옹은 "나는 불행했다. 프랑스, 군대, 조세핀 ...." 이라며 숨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음이 인간에게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죽음이 쏘는 것이 무엇입니까?

55절을 보십시오. 사망이 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망의 승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56절을 보십시오. 죄입니다. 죄로 말이암아 죽음이 온 것입니다. 썩음과 죽음은 죄의 지배의 결과입니다. 죄를 통해서만 사망은 인간에게 권세를 휘두릅니다. 죄가 없으면 사망은 인간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죄는 율법을 통해서만 인간을 정죄하고 지배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습니다. 죄를 효력을 상실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57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정복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고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승리한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늙어 육신적으로 죽지만 주님의 부활로 긍극적으로 승리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합니다. 57절을 같이 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7)” 부활 주일 우리에게 죽음을 정복하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음을 정복한 완전한 승리를 누리게 됩니다.(54-57)

2)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로 주님 재림하실 때 영생의 부활로 참여합니다.(50-53)

50절을 보십시오. 혈과 육 즉 지금 살아 있는 죄로 오염된 육신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수 없습니다. 썩는 육신은 썩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이 죽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51절을 보십시오. 잠자는 것 같지만 마지막 나팔 소리가 들려옵니다. 우리 주님이 재림할 때입니다. 그 때 홀연히 주님의 부활한 몸처럼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당시 살아 있는 자들도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합니다. 사망을 삼키고 이깁니다.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가는 죽지만 죽음의 문을 깨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영생의 부활로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믿습니까? 우리는 죽지만 결국 부활합니다. 죽음은 잠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부활을 믿는 성도의 삶

그러면 부활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어떤 일을 당하여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더욱 견고해져야 합니다. 5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라는 말은 부활을 말씀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고 우리의 부활이 확실하니 이렇게 살아라는 교훈입니다. 부활장인 15장의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고린도 시는 부유하지만 지극히 타락의 도시입니다. 항구도시였습니다. 이만명을 수용하는 야외극장이 있었습니다. 천명 이상의 매춘부들이 있는 아프로디테 여신전이 있었습니다. 코린티아 조마이라는 말은 고린도 사람처럼 행한다는 말인데 매춘행위를 행하는 사람을 칭하는 말입니다. 술집이 많았습니다. 자연스럽게 그 도시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처럼 세속화되었습니다. 교회 내 파당문제가 있었습니다(1:11). 게바파, 아볼로파, 바울파, 예수파 등 파당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첩을 범하는 도덕적 타락이 있을 정도록 교회 내에서도 성적으로 문란하였습니다.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목회자의 권위를 무시하고 은사로 교회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결혼 이혼 문제, 제사 음식 문제, 예배의 질서문제 등이 있었습니다. 부활에 대한 그릇된 사상이 있었습니다. 부활신앙을 흔드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30,35절을 보십시오. 무엇보다 1세기 교회가 그렇듯 갖은 핍박과 고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인들이 처한 상황이나 비슷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신실한 신앙인들의 부활신앙이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가 교회에 다닌다고 합니다. 어쩌다 가정예배도 드립니다. 교회에 나가면 거룩한 것처럼 보입니다. 잘 치장합니다. 화장합니. 분장합니. 변장합니다. 위장합니다. 포장합니다. 그런데 입에는 쌍욕을 달고 다닙니다. 술먹고 주정을 합니다. 날마다 부부싸움을 하여 집안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 밤새워 컴퓨터 게임이나 합니다. 회칠한 무덤같습니다. 결국은 끝장이 납니다. 아이들이 이런 아버지가 믿는 부활을 믿겠습니까? 흔들립니다. 오늘날 언론에 보도되는 교회의 치부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부활신앙에 회의가 생깁니다. “천국이 있다면 저렇게 할까? 부활이 있다면 저 정도 수준일까?” 신앙이 흔들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 환경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자연과학과 역사 비평의 합리적 사고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 속에 실제적으로 일어난 유일한 사건으로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초대 교회의 신앙의 산물로서 인간의 창작에 의해 채색된 신화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학적 사고의 기초가 되는 비평의 원리, 유추의 원리, 상관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과학 문명이 발달되지 않은 당시 제자들의 신앙 고백적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 의하여 신화적으로 꾸며졌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부활에 대한 의심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죽음의 역사성, 둘째, 부활 기사의 신빙성, 셋째는 빈무덤의 역사성, 넷째는 부활 후 출현의 역사성입니다. 결국 부활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실제적이고 유일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가설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일시 기절했을 뿐이며 장사를 한 후 정신이 되돌아와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어두운 새벽길에 잘못 찾아서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이 부활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옮겨 놓고는 부활했다고 거짓을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었는데 돌아가신 후 죄송한 뉘우침에 부활을 말하신 것을 굳게 믿고 심히 피곤하여 머릿속에 그리다가 마침내 환상을 보고서 이것을 실제인양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신화, 동방신화에 나오는 부활설을 예수님께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했다는 것이 사기이고, 환상이고, 꾸며낸 이야기이고, 신화일까요? 기절하였다가 다시 일어났겠습니까?

과학적 증명만 꼭 사실을 입증하는 방법은 아닙니다. 법적-역사적 증명도 있습니다. 법적 증명은 구두증언과 문서상의 증거 그리고 증거물에 의존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성경의 증언이면서 역사적 사실입니다. 빌라도도 '빌라도 보고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초기의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그는 메시아였다. 우리 유대인들 중의 지도층 사람들이 그를 고소했기 때문에 빌라도는 그를 정죄하여 십자가의 처형을 받도록 했다."라고 기록했고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도 "이 이름의 창설자인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 중에 총독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라고 기록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역사적 사실인 것을 확실하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잘못 찾아가서 빈무덤을 보고 착각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묘지는 공동묘지가 아니라 개인 묘지이기에 찾기에 쉬웠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의 위치를 미리 확인하여 두었습니다.(눅23:55).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하여 옮겨놓고 거짓으로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렸겠습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잡히시던 현장에서 도망하고 주님을 부인하던 제자들입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 부활을 전했을 때, 믿지 않으려고 확인까지 하려던 제자들입니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제자들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하였는데 한결같이 거짓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너무 그리다가 그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고 헛소리 한 것입니까? 여러 사람이 일시에 환상을 보고 실제적 사건으로 오인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일간 무려 11번 나타나셨고 갈릴리 지정된 산 위에서는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습니다. 확실한 증거는 부활을 목격한 예수님의 가족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요7:5) 미쳤다고 했습니다.(막3:21)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목격하고 그들의 삶은 변하였습니다(행1:14)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기록했고 유다는 유다서를 기록했습니다. 회의론 자들이 회심한 것입니다. 핵심적인 사회 구조가 변해 버렸습니다. 희생제사, 율법, 안식일을 기반으로 하는 유대 사회가 변했습니다. 1500여 년 동안 이어온 안식일이 예수님이 부활한 날로 예배가 바뀌었습니다. 바벨론, 앗시리아, 페르시아 등에 유대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 이것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유대를 지배한 민족은 사라졌지만 유대인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민족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 사회 구조가 바뀔 수 있겠습니까? 로마가 부활신앙으로 정복되었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채 20년도 되지 않아 로마의 황실까지 들어가 로마의 권력을 지배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 밖에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3절 이하를 보십시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였습니다. 게바에게 열두 제자에게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시고 바울에게 보이셨습니다. 이 말씀이 기록될 당시 대다수 살아있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우리의 믿음도 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변해고 교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가정에 어떤 일이 다가 온다 해도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2)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부활할 것을 확신을 가지면 주의 일에 힘쓸 수밖에 없습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고 하는 책을 쓴 모리 교수는 운동세포가 파괴되어 가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네. 만일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사람들은 금방 딴 사람이 될 걸세.'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부활만 확신한다면 우리 인생은 새로워질 것이다.”라고요. 유명한 수학자요, 과학자요, 철학자였든 파스칼은 팡세에서 "천국! 이것은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도박이다! 그냥 우리가 포기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어마어마한 이것은 도박이다." 파스칼은 수학자이니까 계산을 했을 것입니다. "천국이 없어도, 천국을 믿고 살았든 나에게 별로 손해볼 것은 사실은 없다. 그러나 천국이 정말 존재했다면, 준비만 했었으면 갈 수 있었든 천국, 그런데 그 천국을 내가 놓쳐버렸다면 이것은 큰일이다. 이것은 놓쳐버리기에는, 이것은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어마 어마한 도박이다."

사람들은 흔히 죽음을 인생의 끝이라고 말합니다. "죽으면 다 끝났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아니가 세상에 나오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모태의 삶은 끝이지만 새로운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끝이지만 또 다른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벌레가 고치가 되고 고치가 다시 나비로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을 죽음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의 일꾼은 세 종류입니다. 첫째는 자신을 위하여 일하는 자, 둘째는 일을 위하여 일하는 자, 셋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자입니다. 사명자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주님께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일해야 합니다. 내 일이 아니라 주의 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사업하는 일,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 등을 내 일, 목사님의 일, 사장님의 일이 아니라 주의 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명의식입니다. 더욱 힘쓰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욱 힘쓰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자녀를 정죄하고 가르치려고만 하지 말고 나에게 적용하여 내 내부의 더러운 것을 도려내는 수술도구로 사용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믿음 좋기로 소문한 두 집사님이 차를 타고 출장을 갔답니다. 친하지는 않지만 교회에서 서로 얼굴을 보아 알고 있었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한 집사님이 빵 2개와 우유 하나를 사왔답니다. 한 집사님이 그것을 보고 “빵은 나누어 먹으면 되는데 우유는 어떻게 하려는걸까?”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빵과 우유를 혼자 다 먹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 믿는 집사가 이렇게 할 수 있나라는 생각을 한 집사님이 집사님께 말씀했답니다. "나 요즘 경건의 시간을 가지는데 오늘 아침 읽은 말씀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말씀 이었습니다. 그러자 “저도 오늘 경건의 시간을 가졌는데요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나에게 적용하며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님을 섬기는 것 주의 일입니다. 힘써야 합니다. 손해되는 것 아닙니다. 효도하는 자식들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도 보면 효도하는 집사님들 참 잘 되는 것을 봅니다.

겉으로는 참 효도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집사님이 계셨답니다. 시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 여행을 보내 드려야 한다고 여행을 보내 드렸습니다. 시어머니는 우리 며느리같은 아이 없다고 입에 침이 마르지 않도록 칭찬하였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갑자기 예수님의 빈무덤있는 곳에서 갑자기 돌아가셨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며느리는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DHL 특급배송으로 일분일초도 지체하지 말고 집으로 속히 보내 달라고 닥달을 했답니다. 사람들은 며느리가 얼마나 슬펐으면 하며 그 효심에 감동하였는데 이상하게 여긴 며느리의 친한 친구 집사님이 물었답니다. "집사님, 속으로는 시어머니 되게 싫어했잖아?" 그 때 며느리 집사님이 말했답니다. '그러니까 며칠도 지체할 수 없었지. 거긴 예수님이 부활하신 곳이잖아? 다시 부활하면 어떻게 해'

우리 우리에게 맡겨진 주의 일 무겁고 힘들지만 때로는 자존심 상하고 모든 것을 다 떨쳐 버리고 싶지만 힘쓰고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관찰자가 되지 말고 참여자가 되어 힘써야 합니다. 냉소주의 자가 되지 말고 확신을 가지고 힘써야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힘써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수고하는 것 중에는 헛된 것들이 있는 반면에 영원히 헛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고전 15:12-19) 이 땅에서 하는 모든 것은 허무한 것일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 버리는 공허한 것일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된다고 말씀합니다.(17),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만다고 말씀합니다(14,17). 모든 사람 가운데서 우리는 더욱 불쌍한 자가 된다(19)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음으로 내세가 있음으로 천국이 있음으로 주님을 위한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죽는 죽음은 그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는 죽음일지라도 복있는 죽음이고 영광스러운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42)"

우리가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수고하는 모든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면류관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약1:12). 사명을 다 감당한 사람에게는 의의 면류관(딤후4:8), 믿음의 정조를 지킨 사람에게는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고전9:25), 순교자에게 순교자의 면류관(계2:10), 목자들에게 영광의 면류관(벧전5:4), 영혼을 구원하는 자에게 기쁨의 면류관(살전2:19,20), 영적인 승리자에게 자랑의 면류관(살전2:19)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눈물 흘리며 고생하는 것 언젠가 우리의 눈물을 씻어 줄 날이 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1.4.24

출처 : 목회자의 요람 한서노회

글쓴이 : 다비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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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Dan Stracke

Last Updated: 08/0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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